티스토리 뷰

어려웠다. (프랑스 사람이 쓴 철학 책 싫어 ㅠㅠ)
그래도 지능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면서 이해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그걸 게으름 때문이라 그러니까) 몇 번이고 읽음.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다른 경험을 더 한 뒤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좀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암튼, '지적 해방으로 이어지는 교육'에 대한 고민은 현재 진행형. 

2014.04.15 성인교육방법론 과제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서평


처음 읽을 때부터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이 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다시 읽다 보면 비로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어 읽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책도 있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분명 후자에 해당하는 책이다. 사실 첫 번째로 읽었을 때는 자코토의 일화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무지한 스승'의 방식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와 같은 다소 좁은 시각에서 이 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그룹 토론을 하면서 '지능의 평등'이라는 좀 더 넓은 개념을 중심으로 이 책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게 되었고,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이전에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 하고 넘어갔던 부분들이 보다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또한 책 뒤의 역자의 말과 영문판 역자의 소개글을 읽고 나니, 랑시에르가 이 책을 출판했을 당시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던 교육을 둘러싼 논쟁을 바탕으로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결코 읽기에 쉽지는 않지만, 숨어있는 의미를 조금씩 찾아나가는 재미와 보람을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

먼저, 자코토의 경험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웠다.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학생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설명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무지한 스승이 됨으로써 '보편적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었던 자코토. 그렇다면 나는 그, 또는 그의 학생들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학습자로서 나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지능을 발휘하여 뭔가를 배운 적이 분명 여러 번 있었다. 책에서 말하듯 우리가 어릴 적 말을 배우는 과정이 그러했으며, 새로운 핸드폰을 샀을 때를 생각해보아도 그것의 사용법은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이것 저것 눌러보면서 스스로 깨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설명을 하지 않으면서도 지능을 발휘하도록 의지를 강제하는 무지한 스승의 존재 때문은 아니었기에, 일상적 경험으로 남았을 뿐 여기에서처럼 지능의 평등에 대한 인식과 지적 해방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의지를 강제하는 스승'이라는 말에 떠오른 것은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학생들에게 국어 문제집 세 권을 두 번씩 풀도록 숙제를 내 준 다음 안 해 오면 혹독한 체벌을 가한 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당시 선생님이 가르친 것보다 혼자서 공부를 하면서 배운 것들이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고 숙제 지시에 따랐고,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언제든 물어볼 수 있다는 전제가 바탕에 있었기 때문인지 이러한 경험이 스승의 지능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배움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내가 가르치는 입장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나에게 가르치는 역할을 맡기는 사람은 내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학생을 잘 끌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고, 특히나 그에 대해 금전적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지한 스승이 된다는 것은 직무유기를 하는 것과 같다. 학생의 '지적 해방'과 같은 목표를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학생 스스로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 하면 소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국어나 영어를 가르칠 때 되도록이면 설명을 하지 않는 편인데,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학생이 이해했는지 확인만 하는 것이 교수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이 스스로 깨우치기를 마냥 기다리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나는 이미 문제의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학생이 빨리 그것을 찾지 못 하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들어 그냥 알려주거나 힌트를 주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이처럼 내가 빠르게 답을 제시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순간, 그 학생이 자신의 지능을 사용하여 스스로 이해할 기회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아마도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런 일은 수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종종 일어나고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스스로의 지능을 이용해 무엇을 배우기보다는 그냥 교사가 설명하는 것을 듣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주어진 것을 더 빨리, 남보다 잘 배워야 하는 현재의 학교에서는 아래와 같이 배우는 사람이 앎의 여행을 떠나 자유롭게 모험하는 것은 그저 한가로운 소리로 여겨질 뿐이다.

지적 능력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적 능력의]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앎의 나라로 가는 모든 여행길을 연다.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더 잘 배우거나 못 배우거나, 더 빨리 배우거나 더 늦게 배우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코토의 방법'은 최상의 방법인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다. (61)


그룹 토론에서 가장 의견이 분분했던 주제는 바로 지능의 평등이었다
.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각자가 조금 다른 의미로 '지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배울 수 있는 능력', '지적 능력'이라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얼마나 잘 또는 빨리 배울 수 있는지가 포함된 의미로 '지능'을 사용하고 있었다. 후자의 경우 자신의 교수/학습 경험을 들어 지능이 평등하다는 명제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는데, 이를테면 같은 나이의 아이들에게 같은 내용을 가르쳐도 그들의 이해 정도나 속도는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세계와의 소통을 위해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는 능력을 '지능'이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활동은 지능이 관련된 것이며, 인간의 지능은 평등하다는 데 동의할 수 있게 된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학교에서는 한정된 시간 안에 정해진 내용을 가르쳐야 하다보니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이 중요하게 생각되고, 모두가 자신의 지능을 온전하게 사용하면서 스스로 배움을 얻는 데 꼭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보장하지 못 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시간이 주어지고 각자가 지능을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우리는 이들의 지능이 평등함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랑시에르는 인간의 지능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능이 발현되게 만드는 의지가 불평등할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스스로의 지능이 열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지만 한자만큼은 나에게 있어 큰 약점인데, 어릴 때부터 집에서 한자를 공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고 쓸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하는 한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중국에서 태어나서 한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 있었거나, 수능에서 한자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면 과연 나는 '원래 한자 머리는 떨어지는 모양'이라고 체념을 하고 지금과 같은 한자 실력에 만족했을까? 남들보다 배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더라도, 남들만큼 읽고 쓰며 소통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된 지능은 평등하다는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받아들이기에 좀 어려웠던 부분은, 우리가 지능의 평등을 인정하게 되면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지능이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더 우월한 지능을 가진 사람이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열등한 지능을 가진 사람이 본인에게 걸맞지 않은 자리에 있는 경우나 본래 우월한 지능이 발현될 기회조차 갖지 못 하는 경우이다. 진보주의자들은 후자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학교 교육에서부터 모두가 공평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랑시에르와 같이 지능의 평등을 주장하게 되면, 누가 어떠한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린다. 공장에서 노동자로서 물건을 만드는 것과 재판관으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이 사실상 동일한 인간 지능의 산물이기 때문에 어느 쪽을 우월하거나 열등하게 볼 이유가 없어지고, 다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서로 다른 자리에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월한 일과 열등한 일을 나누어 차별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만, 첫째로는 지금의 사회 구조 안에서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고, 둘째로는 여기에서처럼 지능의 평등에 만족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약자의 자기 만족이나 정신 승리에 그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말하는 지능의 평등은 민주주의에 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우리는 한 명 한 명의 '보통 사람'에게 같은 정도의 결정권이 주어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지능의 불평등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원래부터 합리적이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이들을 끌어올리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해야만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서, 특히 교실 안에서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교사들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인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지만, 완전히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에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교사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보다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미성숙한 학생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학생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환경 속에서 더 우월한 존재인 교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정해진 길을 걸어가는 경험을 한 학생들은, 사회에 나간 이후에도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가 신속하게 좋은 선택으로 이끌어주기를 기대하지는 않을까? 우월한 지능도 열등한 지능도 없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해방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대신에 말이다. 가장 빠르고 좋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실수와 실패가 있을지라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 랑시에르가 말하는 해방된 인간의 일이라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학습자에 대한 불신을 안고 있는 교육은 해방된 인간을 만들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학교가 그러한 교육을 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다른 곳에서는 과연 지적 해방으로 이어지는 교육이 일어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