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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공선옥 (문학동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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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 무렵부터 시작해서 병원 다녀오는 지하철 내내 읽고,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손에서 놓지 않고 읽은 끝에 방금 마지막 장을 덮은 소설. 제목과 표지(내가 가지고 있는 책의 표지는 위에 나와있는 것과 조금 다른데, 어쨌거나 둘 다 좀 소녀틱해서 마음에 쏙 들지는 않는다)를 보고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꽤 다른 내용이었는데, 그 다르다는 것이 좋은 방향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스무살의 로맨스 같은 거려나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하나 둘 속살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에 나는 때때로 책을 덮고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했고, 깊게 숨을 들이쉰 후에야 다시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이 책에 정확한 년도가 나오지는 않은 것 같지만, 때는 언제인고 하니 전모씨가 대통령이던 때, 턱하고 치니 억하고 사람이 죽기도 하던 시절. 전라남도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 아홉 명의 청춘- 그들이 가장 예뻤던 시기는 또한 불안, 아픔들로 가득차 있기도 했다. 이 아홉 명의 이야기가 소설 내내 얽혀 나오지만 그것 때문에 산만한 느낌을 받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그런 구성을 통해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다들 참 '사람'스러워서, 그러니까 정도 많고 요즘처럼 남과 나의 구별이 뚜렷한 때가 아니라서 칙칙한 이야기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푸근하게 느껴졌다. 예를 들어, 친구 자취방에 놀러 갔는데 친구는 없고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만 계시는데, 그 어머니가 자기 딸 먹이려고 해 놓은 밥을 정성스레 딸 친구에게 차려주는 장면이, 요즘은 쉽사리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라 그런지 참 좋았다.

2,3년 전에 이 책이 나와서 그 때 읽었더라면 이만큼 크게 와닿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소설인데, 요즘 시절이 하도 뒤숭숭하다보니 80년대 이야기가 그저 옛날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배부른 소리인 것을 알지만, 차라리 그 때처럼 정말 가진 것이 없다면 모질게 싸워나 볼 수 있지 않을래나, 하고 어중간한 상황을 탓하기도 해 봤다. 30년쯤 지나 2009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나온다면 나는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읽게 될까.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을 때 자꾸 등장인물들에 적합한 배우들이 떠올라 영화화하면 괜찮을 소설이구나 싶었는데, 이 소설도 약간 각색해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일종의 청소년 드라마. 시대는 다르지만 <발레교습소> 같은 느낌이 날 것 같기도 하네 :) 


* 접어놓은 페이지들 *

우리는 이제 더이상 덴뿌라 하나씩 입에 물고 찐빵 같은 웃음만 지어도 행복한 어린애들이 아니었다. 그것이 서러웠다. (p.42)

왠지 마음이 불편해서 언젯적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전축 버튼을 아무거나 툭 건드려보았다. 갑자기 돈 맥클린의 <빈센트>가 흘러나왔다. 아예 고정시켜놓은 듯 테이프를 넣어둔 것이 자기도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는 건가? 하기야 한겨울인데 화실에 난방도 못 하고 점심을 막걸리로 때우는 정도라면 가난 하나는 빈센트 뺨칠 듯싶었다. (p.61)

승희 엄마가 따뜻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누가 나를 대놓고 구박하지도 않았는데 내 인생이 엄청나게 누군가로부터 천대받은 것만 같았다. 천대받은 서러운 인생이 승희 엄마한테 와서야 비로소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만 같았다. 나는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숭늉을 마셨다. 승희 엄마가 내 등을 토닥거려주며 깊은 속에서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악아, 우지 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 게로 우지를 마라." (p.65)

피 흘리는 경애를 안고 목놓아 외쳤다는 수경이.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소리.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임을 외치는 소리. 그러니까 그것은 너의 슬픔에 내 슬픔이 공명하는 소리. 그리고 수경은 목이 터져라 외치다가, 화답 없는 세상에 절망하여 저세상으로 떠났다. (p.251)

사장의 부도덕한 행태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분노보다 어떤 무섬증이 몰려왔다. 인간의 양심이란 것이 사실은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느껴지는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조금 힘이 세다고, 조금 더 가졌다고, 자신보다 약하거나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을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있는 그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막막함 같은 것이었다. (p.257)

진지하게 항의를 하는 통에 웃고 싶지는 않았지만 웃음이 나왔다. 싱거운 웃음이긴 하지만, 웃고 나서 깨달았다. 우리가 너무 오래, 웃지 못했다는 것을. 그야말로 에누리 없이, 근심걱정 하나 없이 웃어본 적이 언제였는가.
누가 웃지 말라고 해서 웃지 않은 것은 아닐진대, 꼭 누군가 웃는 것을 용서치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인가. 어쩌다가 웃음을 참을 수 없을 만치 행복한 순간에도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습관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가. 혹시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되지 않을까, 따뜻한 내 집 창밖에 지금 누군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지는 않은가, 노심초사해야만 겨우 안심이 되는 이 못 말릴 습성이, 노인네들처럼 온갖 세상 근심걱정 다 떠안아야만 겨우 내가 사람 노릇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이 딱한 습벽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이란 말인가. (p.283)

...이부도덕한세상에서너는그어떤이득도취하려고해서는안된다이부도덕한세상에서너는더이상'착한시민'이기만해서는안된다이부도덕한세상에서너는스스로수난자가되어야한다이부도덕한세상에서너는'착한시민'이기를단호히거부해야한다결국부도덕하고사악한자들의뜻이관철되기까지는그모든부도덕함과사악함앞에서도어떻게든수혜자가되고자했던이들그모든부도덕과사악함앞에서도굳이착한시민이고자했던이들의욕망과방관또한작용했기때문이기도하다는것을너는알아야한다... (p.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