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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이 ‘호텔 파이루즈’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다른 곳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에게 자신의 다음 여행지를 이야기했을 때, 그 여행자는 자신이 묵었던 곳이라며 호텔 파이루즈를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정현은 특별히 예약해 둔 숙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미리 수집해 둔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그 곳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홈페이지는커녕 인터넷 카페 하나 없이 입소문으로만 영업을 한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덕분에 기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가 가진 것은 그 여행자가 그려준 어설픈 약도 하나였다. 주변에 이렇다 할 큰 건물은 없었다는 그의 말을 반영하듯, 약도라고 해 봐야 하얀 종이 위에 직직 그어진 몇 개의 선일뿐이었다. 기차역을 빠져 나와 왼쪽으로 10분 정도 큰 길을 따라 걷다가, 삼거리에 다다르면 다시 왼쪽으로 꺾어 5분 정도 걸을 것. 정현이 지시를 충실히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호텔 파이루즈’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았고, 더운 날씨에 이십 분을 헤매다 보니 굳이 자신이 그 곳에 묵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한 오기가 생겨 찾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끊임없이 경적을 울리는 차들이 지나다니는 큰 길과 달리 너무 조용하고 한적한 골목, 분명 이 길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가 마침내 한글로 적힌 안내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텔 파이루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코팅을 해서 붙여놓은 안내문 위에는 누런 흙먼지가 앉아있었다. 마치 컴퓨터로 뽑은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A4 종이에 매직으로 직접 글씨를 쓴 안내문이었다. 하나하나 정성들여 그은 반듯한 획, 맨눈에는 똑같아 보이는 오른쪽과 왼쪽의 여백. 다시 한 번 정현은 이곳이 스피드가 생명인 요즘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저, 계세요?”
 
표지판을 따라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니 그 곳에는 허름한 카페의 분위기를 내는 탁자 몇 개가 놓여있었고 오른쪽 구석에 자그마한 옥탑방 같은 공간이 있었다. 그 곳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삼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여자가 손에 묻은 물방울을 털면서 밖으로 나왔다. 부엌인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 다른 데서 만난 분에게 이야기 듣고 찾아왔는데요.”
 
“네. 며칠 묵으실 건가요?”
 
“아마 이틀 정도 있을 것 같아요. 아직 기차 예약을 안 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파이루즈’라고 소개한 주인 여자는 차분하고 내향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이제까지 여행을 하는 동안 정현은 한국인 여행자를 대상으로 민박집을 운영하는 사장님들을 여럿 만났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사교적이고 쾌활한 사람들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농담 섞인 말을 걸었고, 손님이 묻지 않아도 그 쪽에서 먼저 가 볼 만한 곳이라든지 유명한 음식점 같은 것들을 알려 주곤 했다. 그에 비해 파이루즈는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어서, 그녀가 정현을 데리고 호텔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는 불과 5분 남짓의 시간 동안에도 둘 사이에는 때때로 어색한 침묵의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사실 호텔이라는 이름이 조금 거창하게 느껴질 정도로 ‘호텔 파이루즈’는 아담하고 소박한 곳이었다. 옥상에는 부엌과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아래층에 일반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것 같은 객실 몇 개와 공동 화장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방에 있는 가구라고는 보통 크기의 침대와 자그마한 탁자, 의자 하나와 붙박이장이 전부였지만 잠깐 머물렀다 떠날 여행자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정현은 일단 깨끗하게 청소된 방의 상태를 보고 마음속으로 합격점을 주었다. 그녀는 방에 짐을 풀어놓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함께 주위의 건물들이 한 눈에 들어왔고, 조금 떨어진 번화가의 소음이 들려왔지만 이곳의 평화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낡았지만 정감이 가는 나무 탁자와 현지 스타일의 알록달록한 천이 깔려있는 긴 의자에는 직사광선이 들지 않아서 가만히 앉아 쉬기에 좋아 보였다. 한 구석에는 여행자들이 남겨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여행책자와 소설책들이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정현은 여행책자를 뒤적이다가, 아직 오후 1시밖에 되지 않았으니 뭐라도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주인 여자가 바쁜 것 같아서,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나갈까 그냥 나갈까 정현이 잠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신전이라도 구경하고 올까 하고.”
 
“아, 네. 그럼 잠깐만요.”
 
다시 부엌으로 쏙 들어간 파이루즈는 잠시 후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나왔다.
 
“아직 날씨가 더워요.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앗 감사합니다.”
 
그녀가 챙겨 준 비닐봉지에는 차가운 얼음물과 랩에 싸인 작은 과자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오는 길에 기차에서 빵으로 끼니를 때웠던 터라 아직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던 정현은 비닐봉지를 등에 맨 배낭에 챙겨 넣었다.

 
파이루즈의 말대로, 11월인데도 이곳의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게다가 만만하게 생각했던 신전은 생각보다 꽤 규모가 컸고, 내리쬐는 햇볕을 피할 만한 그늘은 전혀 없었다.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그저 거대한 돌덩어리를 모아 둔 것처럼 보이는 낡은 신전. 정현은 그 돌기둥 사이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정현이 여행을 시작한 것은 약 5개월 전이었다. 작년, 졸업 후 가까스로 취직을 했지만 직장생활은 고달팠다. 처음에는 적응기간이라 몸과 마음이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6개월이 지나도 고단함은 가시지 않았다. 매일같이 야근을 하거나 주말을 직장에서 보내는 것보다도 그녀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자신이 그곳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도 일에 대한 애착은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와 약속한 1년을 채운 후,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을 찾아볼 것인지 고민을 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 힘들게 들어간 직장을 박차고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워할 가족은 없었고, 친구들도 원래 1년이 고비라며 하나같이 그녀를 만류했지만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것보다 그만두는 것이 조금 더 쉬웠기에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런 다음 정현은 이제까지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서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세계 일주라는 것은 꽤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꿈이고, 요즘에는 그 꿈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으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잘 하면 이 기회에 여행 작가라도 되어 남은 생은 좀 다르게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북미와 남미를 거치고 유럽을 지나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내딛기까지 몇 개월. 여자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떠나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들었던 걱정 섞인 잔소리만큼 어렵거나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소매치기를 당해 약간의 현금을 잃어버렸지만 다행히 여권과 카드는 무사했고, 항상 긴장을 풀지 않고 밤늦게 다니지 않은 덕분인지 큰 사고 없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오히려 정현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것은 이제 무엇을 보아도 큰 감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건물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댔고, 약 한 달 전 파리에 있을 때만 해도 개선문 앞에서 샹젤리제 노래를 흥얼대고 있었지만 이제는 웬만큼 크고 멋진 유적을 보아도 그냥 그런가보다 할 뿐이었다. 일상이 되어버린 여행. 매일 매일 장소만 달라질 뿐 자신의 마음은 그대로라는 생각에 그만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한국에 간다고 해서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직장을 그만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멈추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없어 정현은 계속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남짓 돌무더기와 흙먼지 사이를 걸어 다니던 정현은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가방에서 물을 찾았다. 몇 천 년 동안 그곳에 서 있었을 돌기둥 언저리에 걸터앉아 아직 차가운 얼음물을 마시고 나니 그제야 뻐근한 다리의 통증과 은근한 허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배고픔을 조금이나마 달랠 생각으로 비닐봉지에 같이 들어있던 작은 과자 같은 것을 꺼냈다. 겉을 싸고 있는 랩을 벗기니 계피 향이 났고, 건포도와 아몬드 알갱이 같은 것들이 보였다. 크기는 손가락 두 마디에 불과했지만 한 입에 털어 넣기에는 꽤 촘촘하고 단단해 보였기 때문에 정현은 약간을 떼어내어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말린 과일의 달콤함과 견과류의 고소함이 함께 느껴졌다. 얼음물과 함께 천천히 아주 조금씩 먹으며 쉬는 동안 다시 걸을 힘이 솟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힘이라는 것은 그냥 가만히 쉰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에 뭔가 넣어주어야 하는 것임을, 그녀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방으로 돌아와 현지 음식으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지는 해를 등지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정현에게, 컵 두 개를 양손에 들고 파이루즈가 다가왔다.
  “잘 다녀오셨어요?”
 
“네. 여긴 아직 날씨가 더운 것 같아요.”
 
“그러게요. 아직 가을도 안 온 것 같죠? 그래도 저녁이면 좀 쌀쌀해요. 여기 차 드세요.”

 
따끈한 차를 앞에 두고 둘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늘은 다른 여행자는 안 계세요?”
 
“네, 오늘 손님은 정현 씨 한 분이네요.”
 
“요즘 여행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는 건가요?”
 
“음 아직 성수기가 아니기도 하고, 저희 집에는 원래 손님이 많질 않아요.”
 
“사실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민박집들이랑 달리 홍보도 안 하시고.”
 
“그러게요. 광고를 좀 해야 손님들이 많이 오실 텐데, 하하. 그런데 많이 오시면 제가 감당을 못 할 것 같아서, 저는 그냥 이 정도가 좋아요.”

 
“아 참, 아까 물하고 과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과자, 뭐예요?”
 
“아,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영양바 같은 거예요. 여기에서 많이 나는 대추야자하고 아몬드, 건포도, 계피가 들어간 건데, 크기는 작아도 열량은 꽤 높거든요. 여기는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조금만 걸어 다녀도 힘들어서, 물하고 같이 챙겨드려요.”
 
“그렇구나. 맛있었어요.”
 
“그래요? 잠깐만요. 더 있어요.”
 
그녀는 정현이 말릴 틈도 없이 부엌으로 가 작은 접시에 대추야자 영양바를 담아 왔다.
 
“괜찮은데. 그럼 잘 먹겠습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잘 먹어야 돼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고프고 힘없으면 아무리 좋은 걸 봐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잖아요.”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곤조곤 이야기도 잘 하는구나 하고 정현은 생각하며 아까처럼 조금씩 영양바를 먹었다. 오물거리는 정현을 보는 파이루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아 아침은 8시에 준비할게요. 여기로 오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음, 그런데, 저 이틀보다 더 있다 갈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그날 밤, 방으로 돌아온 정현은 하루 이틀 묵어가는 숙소에서와는 다르게 짐을 풀었다. 옷을 꺼내어 붙박이장에 걸었고, 샤워도구는 공동화장실 한 구석에 가지런히 세워 놓았다. 대추야자 영양바가 맛있었기 때문인지, 21세기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호텔 파이루즈의 묘한 편안함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파이루즈’라는 이름처럼 베일에 싸인 것 같은 주인장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그녀는 정확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때는 단지 걸어갈 힘을 얻기 위해 조금 쉬어가야 할 때가 왔고, 그럴 장소에 도착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정현은 그곳에서 비로소 여행을 멈출 에너지를 얻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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