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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멀리하고 풀과 친하게 지낸 것이 어언 1년.  2009/09/23 - [생각주머니] - 채식을 시작하다
위의 글을 썼던 것은 9월 23일이지만 글에서 채식을 한 지 한 달 반 정도가 되었다고 했으니 거의 8월부터 시작했던 셈이다.

한울벗 카페에서는 10년씩 채식을 한 분들도 종종 있어서 1년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겠지만,
어쨌거나 나에게는 나름 의미가 있는 1년이었으니 그동안의 생활을 정리해 보았다.


# "고기 먹고 싶지는 않아?"

채식을 한다고 하면 종종 받는 질문 중의 하나.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 고기 자체가 땡기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대신 고기를 둘러싼 것들 - 이를테면 양념치킨의 소스라거나, 뚝불의 국물 같은 것 - 은 종종 생각이 날 때가 있는데
그런 것들은 맛이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양념치킨맛 콩고기나 콩뚝불 같은 대체식품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결국 튀기고 지지고 볶아 양념을 끼얹은 것들이라는 점에서 굳이 그런 대체식품을 찾아서 먹지는 않으려 했다.

고기는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 반면, 패스츄리 류의 빵이나 케이크의 유혹은 아직도 상당히 강하다.
그렇지만 버터, 우유, 계란이야 간혹 먹어줄 수 있다 쳐도 정제설탕과 흰밀가루를 입에 넣고 싶은 생각은 없고,
통밀가루와 비정제설탕을 쓰면서 바삭바삭함이나 버터의 풍미를 살린 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으니 먹을 일도 별로 없다.


# "채식 하니까 진짜 몸이 좋아져? or 살이 빠졌어?"

건강이 나쁠 때 채식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몸이 더 좋아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배불리 먹고 나서도 소화는 말끔히 되는 느낌과, 사람들이 볼 때마다 피부 좋아졌다고 하는 정도의 변화가 전부인 것 같다.
아, 반대로 기력이 달리지 않느냐는 질문도 종종 받는데, 채식이든 뭐든 워낙 잘 챙겨 먹어서인지 그런 일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워낙 잘 챙겨 먹어서 살은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채식을 시작할 때가 한창 다이어트를 열심히 하던 때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 지금까지 3~4kg는 붙은 것 같다.
나처럼 한 끼도 빠지지 않고 잘 챙겨 먹는 사람, 게다가 두부나 콩 종류, 통밀빵, 각종 과일과 야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채식으로 먹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다이어트가 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_=


# 그 동안의 채식 - 부러지기보다는 구부러져라

작년 글에는 '해물은 먹고 우유, 계란은 안 먹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점차 해물도 줄어서 거의 비건(vegan)으로 지내왔다. 

다만 내 손으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거나 스스로 메뉴를 온전히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때에는 유연하게 대처하려 했다.
예를 들어 한 달 동안 교육실습을 나갔을 때는 급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한 눈에 분간되는 고기, 계란 등만 제외시켰고,
요즘도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을 때 김치에 들어가는 젓갈이나, 거의 모든 국의 베이스가 되는 멸치 육수 등은 통과시키고 있다.
겨울에 프랑스로 예비교사 해외연수를 갔을 때는 '문화체험'이라는 미명 하에 상당히 기준을 누그러뜨렸지만
(나는 프랑스에서 치즈를 먹지 않을 수 없었고, 예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Pain au chocolat를 먹어야만 했으므로!)
채식하기 전에도 그리 즐기지 않았던 '누르면 피 나오는 스테이크'는 차마 입에 댈 수가 없어 먹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즉 종합해 보면 비건(동물성 일절 배제)을 지향하기는 하는데 만약 못 지킬 상황이면 페스코(해물까지 허용)까지도 가는 사이비?

소를 괴롭히지 않는 방식으로 우유를 얻는다면 굳이 비건 채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런 우유를 찾기는 어렵고 돈도 많이 들고 그렇게까지 내가 우유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니 그냥 이렇게 사는 게 편할 것 같다.


# 앞으로의 채식 -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로

채식은 고기 등의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것.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기 안(못) 먹어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 할 때면 왠지 남들 다 먹는 것을 나만 못 먹는 듯한 느낌이 들어 뭔가 부족한 것 같이 생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1년 동안 경험한 채식을 돌아보면서 실제로는 채식이 그런 마이너스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한가득 차려진 식탁에서 고기, 생선, 계란, 우유를 하나씩 빼는 그림으로 채식을 받아들이면,
나중에 남는 것이 '고작' '달랑' 채소랑 곡물 정도라 생각하고 그로부터 '빈약하고 먹을 것이 없다'는 이미지를 받게 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차려지지 않은 식탁에 각종 채소와 과일, 두부, 곡물, 견과류 등을 채워나가는 그림이 진짜 채식이라는 것.

이처럼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완전채식을 하는 이들에게도 매우 다양하고 풍성한 먹거리들이 허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서울에 있는 채식 맛집의 절반도 가보지 못 했고, 여름이 되면 먹으리라 벼렀던 옥수수도 몇 번 못 먹었다 흑흑)

그러니 이제는 '고기를 안 좋아한다, 안 먹는다'는 말 대신, '고기가 아닌 것들을 "훨씬" 더 좋아하고 잘 먹는다'고 이야기해야지.
그러면서 지금까지 다듬어 온 내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그러나 때로는 일탈도 하며, 즐거운 채식 생활을 이어나가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