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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주머니

채식을 시작하다

곰파 2009. 9. 2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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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채식은 아니었지만, 육고기를 멀리하고 지낸 지 약 한 달 반이 되었다.
일종의 '탐색기간'었는데, 본격적으로 채식을 시작하기 전에 불편함이나 좋은 점 같은 걸 미리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
어느 정도는 특수한 생활 패턴 덕분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풀을 먹고 살면서도 특별히 문제될 게 없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이제는 네 저 채식합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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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채식을 시작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이러했다.

사실 처음에 식단을 좀 바꾸게 된 것은 다이어트 때문. 자신의 몸에 대한 왜곡된 인식 어쩌고 하면 뭐 할 말이 없는데,
내 속에 오래 전부터 좀 날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이번 방학, 마음 먹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칼로리를 좀 줄여서 한식 위주로 밥을 먹다가, 보건소에서 인바디 검사를 해 봤는데 역시나,
체지방은 남아 돌고 근육량이 모자란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아마도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평소 먹는 음식들, 입이 좋아하는 기름진 음식들이 결국은 내 몸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런 생각을 하니까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이 막 그리 예뻐보이지가 않았다.
물론 나는 지금도 치킨, 크림파스타, 족발 등등을 좋아하지만, 내 몸을 그런 아이들로 구성하고 싶지는 않더라고.

그래서 이 때부터는 단백질 위주의 식단으로 약간 돌아섰고, 흰밀가루나 버터 같은 것도 거의 입에 대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본 동영상이 '목숨 걸고 편식하다'였는데, 내가 건강 상의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 그런 점에서 와 닿기 보다는
그저 김옥경 씨가 만드는 자연식 밥상이 너무 맛있게 보이는 거다 *_* 제철 채소와 과일들에, 색깔도 참 예쁜 음식들...
그 정도로 음식을 만들 수야 물론! 없지만, 나도 좀 더 건강한 것들을 먹고 지내야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슬슬 육고기는 나의 밥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또 밖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이유로 고기를 먹어야 하는/먹게 되는 상황도 별로 생기지 않았다.

식단을 바꾼 지 약 한 달, 세 번째 받은 인바디 검사에서는 체지방량과 근육량이 정상 범위로 나왔다 :)
정상이다 아니다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늘리기 어렵다는 근육량도 약간 늘어나고, 체지방도 줄어들어서 왠지 뿌듯했다.
운동을 아주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기에 먹는 것의 영향이 컸던 것 같고, 그런 점에서 내가 먹는 것들의 중요성을 다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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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이유는 일종의 생명/환경 문제인데, 내가 굳이 고기를 먹지 않아도 잘 지낼 수 있다면,
그리고 내 밥상에서 고기를 치우는 것이 다른 생명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는 것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먹는 것을 포기하면서 동물권을 보호하자, 이런 이야기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며 일회용컵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듯
각자 자기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감수할 수 있는 만큼의 불편이 다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다.
나는 환경 보호를 목적으로 일회용품을 쓰지 않기 위해 무거운 것들을 다 짊어지고 다니는 수고는 할 자신이 없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나에게 큰 어려움을 야기하지 않고, 그닥 불편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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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에서의 단계로 말하자면 나는 소닭돼지 등은 먹지 않고, 해산물은 먹으며, 계란우유는 먹지 않는 쪽인데
일단 해산물은 걔네를 기르거나 잡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고통을 주지 않으니까 2번의 문제가 별로 없는 것 같고,
사실 해산물을 아주 좋아하는 편도 아니라 먹는 거라고 해 봐야 멸치, 새우, 생선포 정도이기 때문에 계속 먹을 생각이다 -ㅅ-
소닭돼지와 계란우유는 1+2번 문제의 결합이라고 보면 되는데, 계란이나 우유는 가끔 먹고 싶으면 먹을 거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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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즘은, 현미잡곡밥을 주식으로 버섯, 두부, 각종 야채, 견과류 등을 먹으며 살고 있다.
좀 신기한 것은 식단을 바꾸면서 식성도 바뀌었는지, 예전에는 입에도 잘 안 대던 꽈리고추나 양파 같은 걸 막 먹는다는 것.
점심 때는 도시락을 싸 가서 친구와 함께 먹는데, 주로 집에 구비된 멸치볶음, 무말랭이 같은 밑반찬과 함께 
두부조림이나 고구마볶음 같은 것들을 반찬으로 가져가고, 요즘에는 미니 파프리카도 한 두개 가져가서 같이 먹는다.

어떤 사람들은 일종의 경외심과 의아함이 섞인 눈으로 우리를 보면서 '자취하면서 어떻게 도시락을 싸 다니냐'고 이야기를 하던데
첫째로는 요즘 학교 다니고 과외 하고 공부하는 일 외에는 크게 바쁘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기에 이것이 가능하고,
둘째로는 도시락을 싸는 것이 재미있고 ('일'이 아니다!) 나에게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깝지 않으며
셋째로는 밥 해 놓고 반찬 해 놓으면 도시락 싸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기에 별 어려울 게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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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을 시작했고, 앞으로 지속해 나갈 생각이지만 '죽어도 고기는 먹지 않겠다' 뭐 이런 결심은 아님을 밝힌다.
어디서 본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데, 만약 할머니가 내 밥숟가락 위에 고기를 얹어주셔도 안 먹을 건가, 하면 그건 아니다.
아마 다른 문화권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 곳의 음식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고기를 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고기를 드셔야 낫는 병입니다'(근데 이런 병도 있나?)이러면 또 먹을 것이고.

고로 나의 채식은 신념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행동이며,
내가 지금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가치들을 이어나가는 한은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