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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날씨가 영 안 좋았다.
수업에서 선생님이 일기예보에서 폭풍우라고 했으니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 말대로 바람은 휭휭 무서운 소리를 내며 엄청 불어대고, 비도 종일 내리고.

아침 8시 그리고 11시 15분 이렇게 2개의 수업만 있는 날이라 마음이 가벼웠지만
안타까운 것은 시내에서 2시에 약속이 있었다는 점 (-_-)
덕분에 선생님의 "이런 날 쇼핑하러 시내 가지 말라"는 충고를 들은 보람도 없이
시내에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20분 내내 비를 맞으며 걸어와야 했다.
물론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우산은 가지고 나갔었지만,
난 내 소중한 우산이 홀딱 뒤집어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덜 소중한 내가 비를 맞는 것을 선택했다고나 할까.

여튼 그래서 언니에게 부치려 했던 스웨터도 그냥 가지고 얼른 돌아와 버렸는데
집에 들어오니 수첩에 적힌 "오늘의 할 일" 들에도 불구하고 영 펜을 잡기가 싫은 상태.
하긴 방학 이후로 약 열흘 동안 착실하게 할 일을 잘 지켜가며 생활했으니
이제 하루쯤 모든 할 일을 잊어버리고 쉬어줘야 할 때가 온 건가, 라고 합리화.
그 후로 '파견의 품격' 6-10회를 보면서 하루를 아주 잘 놀았다 :D 아하하



오늘 오후의 약속은 한국에서 입양된 한 프랑스인(이름은 Marie)과의 만남이었다.
어학원 게시판에 자신에 대한 소개와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쪽지가 붙어있길래
조금 망설이다가 연락했는데 (음 사실 여전히 프랑스어에 자신이 없어서 망설임)
오늘 만나보니 참 괜찮은 사람이어서, 앞으로의 시간이 많이 기대된다.
아 그러고 보면, 뭔가 기대되는 일이나 계획들이 생기면
일이 통 손에 안 잡히는 내 성격 때문에 오늘 하루를 날린 것일지도 모르겠네.

일단은 프랑스인과 함께 대화하고, 공부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좋지만
그보다도 외국인 학습자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을 도울 기회라니, 흔치 않은 기회다 'ㅡ'
특히나, 입학 면접이랑 21세기 어쩌구 면접에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을 이야기했던,
그리고 프랑스에 올 때도 조금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나에게는 더욱 놀랍고 감사한 인연이다.

Marie는 1살 반에 프랑스로 입양되었고 지금은 앙제 근처 동네에서 약사로 일한다고 :D
한국어는 어른이 되고야 조금 배웠다고 하는데 간단한 표현은 할 줄 아는 듯 했다.
한국을 방문한 것은 세 번이고 어느 해 여름에는 3개월 연수로 서울대 병원에서 일 했다고 한다.

내가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다음 주에 만나서 Marie가 가지고 있는 한국어 교재를 봐야 구체적으로 나올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제 한 학기가 다 끝나 가는데 나의 프랑스어는 얼마나 늘었을까?

아직 자격 시험 같은 것도 본 적이 없고 학기 말 시험도 치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어렴풋이 느끼기에는, '아기가 기어다니다가 뭔가 붙잡고 일어선' 단계 쯤이랄까.
한국에서 학교 수업으로는 한 학기, 알리앙스도 다니긴 했지만 정말 기어다니는 수준이었는데
한 학기의 끝에 선 지금은 그 동안의 공부가 조금씩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음 얼기설기한 그물쯤이 짜여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하핫)

그래도 계속 성실하게 공부하면 내가 목표로 하던 것은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잡았던 목표는 기어다니는 상태에서 걸어다니는 상태 정도로 발전하는 것 'ㅡ'
한국에서 라틴어 희랍어 전공이랑 프랑스어까지 같이 하면 계속 기어다니는 수준일 것 같아서
어느 하나라도 좀 궤도에 올려놓고 10년 공부(헉)를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사실 내 목표가 그러하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전공으로 하거나 아예 이 곳에서 대학을 다닐 사람들보다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왕 온 것이니만큼 제대로' '무엇이든 하나라도 할 때는 확실하게' 등의 생각은 변함 없어서
착실한 학생으로서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고 공부도 그럭저럭 열심히 하고 있지만
일단은 뭔가 나를 누르는 것이 없이 그냥 편하게 딱 한 가지만 공부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어학 실력이 엄청 늘었다는 전설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 나도...' 하는 욕심은 들지만
그냥 내 수준에서 만족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 내고, 여기서 충분히 휴식하고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하지 않을까? 이 한 해는 나에게 '안식년' 같은 것이니까... 'ㅡ'



참 어제는 꿈에서 ㄴㅅㅎ 를 만났다!

가끔 꿈에 아는 사람이 나오면 꿈에서는 어 누구다 라고 인식을 하지만
막상 꿈에서 깨고 나면 그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은데,
어제 꿈에 나온 것은 진짜 ㄴㅅㅎ 였다, 정말 생생한 100% 짜리, 크크

굉장히 이상하지만 (꿈이니까 당연한가) ㅇㅅ 셋째날인 것 같았고
ㅇㄷㅊㅇ을 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ㅇㄱ 언니랑 ㅇㅊ 오빠가 내 양 옆에 있었고
그러다가 ㄴㅅㅎ가 버스를 타고 내 기숙사(였지만 일어나서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은)에 놀러왔는데
내가 그렇게 더 놀다 가라고 만류해도 그 특유의 말투로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요상한 꿈.

꿈 때문인지, 오늘 우산을 가지고 나갈 때는 같은 우산을 가진 ㅃ 언니가 떠올랐고
Marie와 이야기할 때 약사라는 말을 들으니 ㅅㅇ 오빠랑 ㅈㅎ 언니가 떠올랐고
게다가 서울대 병원에서 일했다니, 4호선 대학로가 떠오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파견의 품격'을 보면서도 ㅇㅅㅂㅅ가 연상되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에잇.



그렇게,
조금씩 향해가고 있는 꿈과
남겨 두고 온 소중한 추억들이
비바람 속에서 뒤엉켰던 오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