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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주머니

비소설가의 변명

곰파 2009. 5. 2. 12:57

    세미나에서 몇 번 이야기했듯이, 나는 소설을 써 본 적도 쓰려는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스스로는 작가와 같은 생산적 인간에 대비되는 소비적 인간이라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전까지는 그러한 내 모습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 일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 그럼 나는 왜?'라는 물음이 슬슬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나라는 인간이 '소설을 쓰고 싶을 이유'가 없을 만한 인간인 것은 또 아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글 잘 쓴다는 칭찬은 많이 들어왔고 중학교 3년 내내 백일장에 나가곤 했고 또 고등학교에서는 교지편집을 담당하는 문예부에서, 딱히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시를 쓰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것들이 '김은파가 소설을 쓰고 싶어할 만한 이유'야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글 쓰는 것을 처음부터 싫어한 것도 아니고 읽는 것은 좋아라하는 사람이면서 난 왜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 거냐고. 이런 것을 담당하는 병원이 있으면 가서 전문가의 견해라도 들어보련만, 이건 뭐 가장 가까운 병원이 정신병원인 듯 싶으니 조용히 혼자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다.

    내가 꼽는 첫번째 이유는, 내 손으로 쓰려니 슬프지만, 상상력의 부재가 되겠다. 나도 버스 안 망상에는 매우 익숙하고, 가까운 미래에서 먼 미래까지,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계획하는 것을 참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들은 아주 개인적이고 현실에 발을 둔 상상들에 불과하다. 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가 생전 경험하지도 않은 것들까지도 생생하게 보고 듣고 느끼는 힘 같은 거 아닌가. 그런 게 없으면 무엇을 상상해도 눈 앞에 보이거나 귓가에 들리거나 하는 것이 없으니까 소설로 쓸 만한 것도 덩달아 없어지는 거다. 

    
이러한 상상력의 결핍은 당연히, 독자로서의 나에게도 '좀' 영향을 미친다. 한 예로 해리포터 시리즈가 한창 인기를 끌다가 막 영화가 나왔을 때,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게 자기가 상상했던 거랑 비슷하다는 둥 전혀 다르다는 둥 말들이 많았는데, 솔직히 나는 할 말이 전혀 없었던 게 해리포터를 읽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머리 속에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운데, 아래처럼 나타낼 수 있을 것 같다. (글자를 어느 정도나 이미지로 받아들이는지에 있어서는 '타인' 분류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인 : (책) 글자 --------------------- (머리) 내용

타인 : (책) 글자 ------- 이미지 ------- (머리) 내용

 

    그러니까 나는 '곱단이가 흰 얼굴에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문장이 있으면 '흰 얼굴에 큰 눈을 가진 곱단이'를 머리에 받아들이지 그런 곱단이 얼굴을 그려보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말이 옆길로 많이 샜는데, 다시 정리하자면 상상력이 부족해서 소설을 쓸 수가 없고 쓰려는 생각도 안 해 봤다 정도가 되려나.

 

    두번째로는, 내가 길게 말하는 건 딱 질색인 사람이라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다 아는 이야기는 건너 뛰고, 필요하거나 중요하거나 재미있는 것만 남겨서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하다보니, 재미없고 영양가 없는 이야기 지지부진 늘어놓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고,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거지. 무슨 이야기를 해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이야기꾼들처럼 타고난 재능이라도 있으면 누가 말려도 소설을 쓸텐데 난 이도 저도 아니니, 아 내가 이제껏 소설을 안 쓰고 있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제껏 말하지 못 한, 그리고 특별히 '소설'로 전해야 할 이야깃거리가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바깥에 내놓을 수 없던 이야기를 자기 속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이야기는 '만드는' 것이지만 흔히 말하듯 무에서 유를 짠하고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의 것을 가져와서 자기 안의 것과 잘 버무려 내놓는 것일 게다. 그러니 결국 자기 안에 아무 것도 없으면 어떤 대단한 것을 경험해도 그 경험은 경험으로만 남아 있을 뿐, 그 자체로 문학이 되지는 못 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 안에도 아직 다 이야기하지 못 한 무언가가 있긴 하지만, 아마도 소설을 통해 그것을 이야기하기에는 그에 관련된 능력이 부족하거나 소설이라는 형식이 아주 잘 어울리는 내용이 아닌가 보다.

 

    지금까지, 왜 나라는 인간은 소설을 쓰지 않고, 쓰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으며 또한 앞으로도 쓸 가능성이 거의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위의 이유들에 덧붙여서, 창작이란 슬쩍 발 담가 보기에는 너무 힘든 작업이지 않은가! 나는 이 수준의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를 돌아보느라 이렇게 힘이 들었는데, 작가들이 겪을 고통이란, 원. 그래서 다짐하는 바, 앞으로도 나는 충실한 소비자로서, 그들이 자신의 뼈를 깎으며 세상에 내놓는 소설들을 애정어린 손길로 대하고 성심성의껏 읽어주리라.

 

 

덧.

내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쓸 정도의 사람이라면 소설가로 사는 것은 본인으로서도 참 행복한 일이고, 세상에도 큰 이익이 되리라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문장들의 총집합은 고사하고, 단 한 문장도, 쓰지 못 하겠다.



-  문학학회 프로젝트(응?)를 위해 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