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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앞의 생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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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줄거리를 정리해 놓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의 전개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일어나지 않고, 주인공 소년 모모의 시점에서 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욱 나열되는 식이라 과연 소설이 끝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하는 걸까 하는 의심을 할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볼 때 서사에 중심을 두는 내 취향의 소설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읽는 것이 시간이 아까웠다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좀 특수한 카테고리에 들어갈 것 같다, 이 소설.

솔직히 말해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의 8할은 이 책의 작가가 차지한다.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이 소설을 썼고, <자기 앞의 생>으로 또 한 번 공쿠르 상을 받아 유일하게 그 상을 두 번 받은 사람이 되었으며 죽기 전까지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한다. 아마도 많은 작가들이 이런 것을 꿈꿔보지 않을까. 이미 알려진 자신의 이름, 비평가들이 씌워 놓은 굴레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이름으로 시작하여 다시 세인들에게 인정받는 것. 나 또한, 종종 서점 가장 좋은 자리에 진열된 베스트 셀러 소설들을 보면서 만약 그것들이 그렇게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상황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했던 독자로서, 로맹 가리의 시도와 성공을 재미있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이 소설에 손을 댄 데에는 그런 부수적 이유가 더 컸으므로, 이 소설 자체에 대한 감상은 스스로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 놀란 것은, 이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큰 감동을 받는 사람들도 꽤 있다는 것이다. 각 사람마다 마음을 움직이게 되는 주파수라는 것이 다르니 물론 왜 이 책이라고 그런 감동을 못 주겠냐마는, 나는 이 책의 어느 부분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건드리는지 궁금하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감정이입할 상대를 찾을 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이 소설이 사람들을 울리려 들지 않는 점- 소재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만한 것인데도 -이 <자기 앞의 생>의 큰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한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 내 주위에는 이 책을 읽고 운 사람이 없을 것 같다, 흑.

또 하나, 어쩌면 이 소설에서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안락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부분들이 꽤 있다. 학교, 또는 독서 프로그램에서라면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고 그런 부분을 포인트로 잡아 이야기해 보게 하는 것도 의미있지 싶다.


* 접어 놓은 페이지들 *

카츠 선생님의 말에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병원에 갔다 하면 아무리 아파서 죽을 지경이라 해도 안락사를 시켜주지 않고 살덩이가 아직 썩지 않아 주사바늘 찌를 틈만 있으면 언제까지고 억지로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을 이 동네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최후의 결정은 의학이 하는 것이고, 의학은 하느님의 의지와 끝까지 싸우려 한다는 것을. (p.231)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p.275)

그것은 곰브로비치가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그에게 만들어준 얼굴"이 한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런 시도를 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이자 그 시도가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얼굴"은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中, p.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