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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 글은
산에 갔다왔다는 자랑 + 채식에 대한 생각 + 옛날에 읽은 책(부엌) + 요즘 배운 이론(바흐찐) 의 짬뽕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바로 탁쌤이 원하시는 21세기의 글쓰기가 아니겠냐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어요.

그다지 재미는 없겠지만 혹 읽어 보실 분들을 위해 :)

  

  지난 토요일, 드디어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온 듯 따뜻했던 그 날, 나는 처음으로 관악산에 올랐다. 그 기슭에 있는 학교를 다닌 지 5년 만에, 비로소 산을 오를 마음이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어차피 도로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흙을 밟고 나무 사이를 지날 때 드는 상쾌한 기분에 나도 나이를 먹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 정문 쪽에서 등산을 시작해서 삼막사까지 갔다가 다시 같은 길로 내려왔는데, 사실 전에는 관악산에 그렇게 여러 개의 등산로가 있는지 알 지 못 했다. 주말이면 학교로 들어가는 버스를 가득 메운 등산객들을 보고서 서울대 정문 근처의 관악산 입구와 공대, 이렇게 두 길이 있으리라 짐작했었고, 버들골 위쪽으로도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은 주워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녀와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것 외에도 낙성대 쪽으로 올라가는 길, 과천이나 안양 쪽에서 오는 길 등 다양한 등산로가 존재했다. 모두가 같은 곳에서 출발하여 경주하듯 연주암이라는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목적과 취향에 맞게 산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 날 관악산을 함께 오른 이들은 인터넷 채식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산을 오르는 이유가 다양하듯, 채식을 하는 이유도 사람마다 다양하다. 고기를 먹으면 탈이 나기에 먹지 않는 사람, 암과 같은 큰 병에 걸려 채식으로 치료해 보려는 사람, 동물에 대한 사랑에서 채식을 시작한 사람, 축산업으로 인해 환경 문제가 심화된다는 이유로 육식을 끊은 사람…. 비채식인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다 같은 채식인처럼 보일지 몰라도, 채식을 하는 이유와 정도의 면에서 그들은 각기 다른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왜 채식을 하게 되었고, 채식을 하면서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의 삶의 한 페이지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 늘 흥미로웠다.


  내가 채식을 처음 생각해 본 것은 새내기 시절 오수연의 『부엌』이라는 소설을 통해서였다. 이 소설의 배경은 글에서 명시되지 않지만, 인도쯤으로 추정된다. 주인공 ‘나’는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 서서 요리하기가 싫어 고향을 떠난 사람이다. ‘나’에 대해서도, 그녀가 만나는 두 명의 남자인 ‘다모’와 ‘무라뜨’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정보는 주어지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인 다모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다른 이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도 원하지 않는 인물로, 육식을 하는 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들을 해친다는 생각에서 음식을 극도로 절제한다. 그에 비해 무라뜨는 육식주의자라 부를 만하다. 그는 왕성한 식욕을 가졌고, 식욕을 잃은 ‘나’를 위해 온갖 강렬한 맛의 고기 요리를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너무나 다른 인물들이 ‘나’의 부엌에 찾아와 요리를 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가운데 ‘다모’와 ‘무라뜨’ 사이에서 먹고 먹히는 관계에 대한 ‘나’의 고민은 깊어 간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당시에는 설명할 수 없이 마음이 답답했다. 도대체 작가는 이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하는 의문만 가득했다. 우리가 피식자 또는 포식자 어느 쪽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최소한 윤리적으로 어느 쪽이 더 옳다는 주장도 없었다. ‘나’와 다모, 그리고 무라뜨의 목소리와 서로 다른 입장은 공존하고 있었고 작가는 어느 편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계획대로 이야기를 끌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인물들을 방임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 수 있다는 것은, 이번에 다성성에 대해 공부하면서야 처음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이 소설 속의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던 그 때, 또 하나 나를 괴롭혔던 것이 바로 채식의 문제였다. 다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처럼 느껴졌고, 그에 따르자면 나도 채식을 해야 할 것만 같았기에 나는 당시 대학 사회에서의 채식 담론에 대해 조금 공부를 해 보았다. 그러나 5년 전만 하더라도 채식은 지금처럼 개인의 취향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 선택으로 인식되었고, 그러한 당위의 선택은 윤리적으로는 옳아보였지만 직접 뛰어들기에는 뭔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결국 몇 주에 걸친 나의 고민은 거기에서 끝을 맺었다.


  그러고 나서 채식을 잊고 지낸 지 몇 년, 건강 문제로 고기를 먹지 않는 친구를 보면서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는 말에 동감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나만의 이유를 가지고 다시 채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나의 목소리를 가진 지금에서야 나는 다모와 무라뜨의 목소리를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와 같은 거대 담론의 대표가 아닌, 각기 나름의 삶과 상처를 가진 인물들의 목소리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변화를 생각할 때, 이전의 한국문학이 역사의 굴곡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전형적인 인물들로 가득하고, 작가에 의해 의도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보다 다양한 목소리를 드러낼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나 생각한다. 산을 오르는 이들을 모두 동일한 등산객으로 묶는 것이 실제로 산을 오르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이유를 보여줄 수 없듯이, 작가에 의해 통제된 인물들은 그들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풍성함을 가로막는다. 목소리를 가진 개인으로서, 나는 지금보다 다성성을 획득한 한국문학이 우리 삶의 흥미로운 단면을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