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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민규 (창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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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읽었을까?
<핑퐁>을 처음 본 것은 창비에 연재될 당시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내가 펼친 부분은 '핑퐁'이 끝도 없이 나열된 그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박민규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레벨이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다시 <핑퐁>에 손을 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4년에 가까운 시간이 훌쩍 흘렀고, 종강 이후 읽을 책을 고르면서 일종의 '지평의 전환'을 불러 일으킬 만한 책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손에는 <핑퐁>이 들려 있었다. 어쩌면 나는 2005년 여름,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며 받았던, 그런 충격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 어땠냐고?
일단은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박민규 스타일을 좋아한다. 정말 뜬금없는 비유도 있고, 대체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왜 하나 싶지만 은근히 그것들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박민규 소설의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패자'의 분위기를 좋아하는데, <핑퐁>의 주인공들도 비슷했다. (아, 결코 인물들 자체를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다.) 쓸데없는(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묘사들이 많지 않아 읽기도 편하고.. (그렇지만 내 취향에는 <핑퐁>보다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더 맞는 것 같다.)


■ 무슨 생각을 했냐면...
1.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 '그런 사람이 되면 /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소설에는 따를 당하는 중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무리에서 배제되는 것은,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빨간 코를 가진 루돌프라든지, 실은 백조였던 미운 오리 새끼의 예를 봐도 그렇지 않았던가. 이처럼 무리 속에서 눈에 띈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에, 실상 인간은 각기 매우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다수가 되기 위해서, 아니면 다수와는 다른 어떤 개인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지만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다수에 속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꼭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인간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소속감이라는 것이 필요하니까. 그렇지만 원래 나의 색깔을 숨기고 세상이 조장해 놓은 여론에 묻어가는 것은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할 일이 아닐까. 그런데 최소한 그런 감정이라도 느끼려면, '나'라는 개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겠지.
2. '이 세계는 그래서 /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듀스포인트'에 대한 대목을 읽으면서, 구약성경 <창세기>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하느님이 온갖 불의가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를 없애버리려고 하자, 아브라함이 의인 50명이 있어도 그들을 같이 멸하시려냐고 묻는다. 하느님이 만약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소돔과 고모라를 없애지 않겠다고 하시자, 아브라함은 자신이 없었는지 45명, 40명, 점점 숫자를 줄여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들을 봐서 전부를 살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뭐 결국 이 도시들에는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하고 말았지만.)

이 소설에서 세계가 완전히 나쁜 곳이나 좋은 곳이 될 수 없는 것도 어떤 이들이 나쁜 짓을 하는 한편, 또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실은 <창세기>에서처럼 뚜렷이 악인과 의인이 구분된다기보다는, 한 사람 안에서도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이 공존하고, 경우에 따라 그 두 가지가 모두 발현되는 듯하다. 악한 부분이라고 해서 칼 들고 사람을 찌르는 인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수 속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인간' 자체가 무섭고 위험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늘 그런 모습만 보이는 것은 아니니까. 이 세상을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소망과 그럴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교육을 통해 가능하리라는 생각. 이런 것들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 같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세계는 다수결이다. (중략)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치수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냉풍이 다시 폭포처럼, 송풍구에서 쏟아져내렸다. 손을 뻗어 송풍구의 밸브를 잠그려 애써보았다. 퓌 퓌, 고장난 밸브의 덮개 한쪽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 밸브를 열었다. 확실히 춥긴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거 에어컨 좀 끕시다, 라고 소리치는 것은, 그래서 날 좀 따돌리지 말라니까, 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모쪼록 그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반팔 아래의 삼두박근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 나는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다수의 결정이다. 참고, 따라야 한다. 에취. 뒤에서 누군가 심한 재채기를 했지만, 이내 버스 속은 잠잠해졌다.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29쪽)

꿈이 있다면 /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따 같은 거 당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수인 척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일정하게, 늘 적당한 순위를 유지하고, 또 인간인만큼 고민(개인적인)에 빠지거나 그것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고, 졸업을 하고,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거나 전철을 갈아타고, 노력하고, 근면하며, 무엇보다 여론을 따를 줄 알고, 듣고, 조성하고, 편한 사람으로 통하고, 적당한 직장이라도 얻게 되면 감사하고, 감사할 줄 알고, 이를테면 신앙을 가지거나, 우연히 홈쇼핑에서 정말 좋은 제품을 발견하기도 하고, 구매를 하고, 소비를 하고, 적당한 싯점에 면허를 따고, 어느날 들이닥칙 귀중한 직장동료들에게 오분, 오분 만에 갈비찜을 대접할 줄 알고, 자네도 참, 해서 한번쯤은 모두를 만족시킬 줄 아는 그런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면 / 행복할 수 있을까? (34쪽)

탁구를 쳐본 적 있을까? 뭐가? 너의 사촌형 말이야, 죽기 전에 탁구를 쳐봤을까,라는 말이지. 땀을 닦으며 내가 말했다. 글쎄. 손질한 러버를 돌려보며 모아이가 대답했다. 우리는 공평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축구나 야구 같은 건 해보지 않았을까? 그건... 그냥 살았다는 얘기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평하지 못했을 거야. 패스도 한번 못 받거나, 아흔 개의 공을 혼자 던졌어야 했을 수도 있어. (61쪽)

이 세계는 /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흑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118쪽)

자, 이번엔 모아이가 스매시를 했어. 역시나 일주일간 다듬은 폼을 나한테 보낸 거야. 나는, 실은 사십오억년이나 리씨브의 폼을 다듬어왔어. 좋아, 그런데 공이 지금처럼 네트에 걸리며 떨어진 거야. 사십오억년의 폼으로도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지. 이럴 땐 모아이가 나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어. 그게 뭐지? / 럭키! / 그렇지, 바로 이 순간 자신의 득점에 운이 따랐을 뿐이라고 외쳐주는 거야. 탁구의 중요한 예절이지. 인류가 바로 이 경우에 속하는 거야. 인류의 폼이 반격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순간 이런 행운이 따라줬기 때문이지. 그래서 실은, 인류는 다 함께 <럭키>라고 외쳐야만 해. 공이 왔던 곳을 향해, 자신들의 자세를 받아 주는 곳을 향해서 말이야. (142쪽)

인간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만 볼트의 파괴자가 남아 있을까? 학살을 자행한 것은 수천 볼트의 괴물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는 건 모두 미미한 인간들이야. 독재자도 전범도, 모두가 실은 9볼트 정도의 인간들이란 거지. 요는 인간에게 그 배치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利己)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感電死)할 수 있는 거니까. (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