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생각만큼 술술 읽히거나, 재미있지는 않았던 책- 그렇지만 과제를 위해 참고 읽을만한 가치는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바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옳은 것일지라도 당당하게 '그렇게 살겠다, 난 그렇게 살 수 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작년과 가장 크게 다른 점.
디즈니가 꿈꾸는 그들만의 유토피아
교육사회학원론 시간에 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신 여러 권의 책 중에서 독후감을 쓸 책으로 이 책을 고르게 된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원래의 제목인 ‘The Mouse That Roared : Disney and the End of Innocence’를 알기 전, 우리말 번역판의 제목 『디즈니 순수함과 거짓말』을 보고 내가 처음 받았던 느낌은 바로 ‘모순됨’이었다. ‘디즈니’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바는 ‘순수함’과는 통하는 측면이 많이 있지만 ‘거짓말’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목에서부터 강하게 드러난 모순됨은, 이 책이 내가 잘 알지 못 하고 있는 디즈니의 숨겨진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책에 대한 강한 기대와 호기심을 갖고 책을 펼쳤건만, 고백하건대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책의 내용 자체가 술술 읽어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번역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36쪽을 보면, ‘다시 말해 디즈니가 생산하는 많은 문화적 생산물에는 기업의 의도뿐만 아니라, 디즈니 제품을 구입하고 테마 공원을 방문하고 디즈니 방송을 듣고 디즈니의 브로드웨이 연극 <라이온 킹>을 보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대단한 즐거움까지 제공하고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은 주술 호응이 되어 있지 않은 문장인지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듭 읽고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원문 자체의 문제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여러 곳에 이런 문장들이 자리 잡고 있어 내용을 이해하기에 어렵다는 점이 이 책에 대해 남는 아쉬움이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에 대한 아쉬움을 빼면, 이 책은 처음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디즈니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인 헨리 지루는 이 책에서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대기업 디즈니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여기에서 실체라는 말은 디즈니사가 불법적으로 자신들의 이윤을 추구한다거나 의도적인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가 비판하는 것은 디즈니가 제공하는 문화상품들이 권력, 정치, 사상, 역사 등에서 자유로운 중립지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그저 순수함 자체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디즈니는 그러한 인식을 이용하여 아이들의 꿈을 상업화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 하는 사이에 민주주의의 기틀을 흔들 수도 있다. 그렇기에 헨리 지루는 디즈니로 대변되는 거대 기업들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사회 문제와 연관 지어 생각하며, 학교 안팎에서는 비판적인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렇듯 이 책에서는 디즈니에 대한 복잡하고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책을 읽으면서 제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단순한 사실, 즉 디즈니가 엄청난 규모의 기업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그만큼 일반인들이 디즈니사에 대해 잘 알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말 해 주기도 한다. 책을 펴기 전까지 디즈니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 것은 대규모 문화 기업이 아니라, 미키마우스를 만들어낸 사람인 월트 디즈니라든가 디즈니 만화영화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디즈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친근감은 미키마우스나 도날드덕에서 비롯된 것이며, 디즈니라는 단어에서 즉각 연상되는 것 또한 어릴 적 일요일 아침에 방영되던 ‘디즈니 만화동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더 큰 힘을 가진 것은 디즈니라는 기업이며 현실 속의 그 기업은 방송사, 영화 제작사, 유선 방송국, 수백 개의 직영매장을 소유하고 있으며 매년 기록적인 매출을 올린다. 이 자체가 디즈니사의 양면성, 곧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 순수함을 내세우면서 그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덩치 큰 기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디즈니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대 의견이나, 외부의 경쟁자를 누르는 모습을 보면 그 이중성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디즈니는 자신이 소유한 방송사의 기획 보도나 뉴스 프로그램이 디즈니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는 것을 여러 방식으로 제한하며, 자신의 문화 상품을 파는 데 있어서도 탐욕스러우며 공격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서도 디즈니사가 행복하고 즐거우며 신비로운, 자신들의 이미지를 그대로 보유하는 것은 놀라운 양면성으로 느껴졌다.
곧 이어 나오는 디즈니의 기업문화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막연한 상상이나 이미지처럼 디즈니가 자유롭고 행복한 모습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디즈니사는 고용한 직원을 주인으로 변형시키고, 직원 간에는 마치 가족처럼 서로 이름을 사용하도록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조직 내에서는 매우 엄격한 규율과 권위가 적용되는 것을, 디즈니 대학의 설명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의상을 세심하게 규제하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옷의 종류뿐만 아니라 목걸이와 반지의 개수까지 제한하는 세심한 지침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디즈니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나는 디즈니에 대해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을 만큼 밀접하지도 못 하지만, 그러한 규제와 권위는 적어도 꿈이나 어린 시절의 순수함, 이런 것과는 가깝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디즈니식의 엄격한 통제에 다시 한 번 놀란 것은 ‘2장 디즈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에 나오는 축하마을과 축하학교에 대해 읽으면서였다. 축하마을이란 디즈니사가 미국의 이상적인 공동체로 만든 최신식 동네이고, 축하학교는 그 마을에 세워진 학교이다. 사실 처음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축하마을과 축하학교에 굉장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마을의 여러 면모는 나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즉 축하마을은 깨끗한 고가의 집들로 이루어져 있고 최신식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아담한 정원에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 살기를 꿈꾸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마을의 놀라운 점은, 마치 앞서 디즈니사가 학생들의 의상을 규제했던 것처럼, 잔디에서부터 지붕까지 모든 것을 디즈니사의 통제 아래 둔다는 것이다. 보통은 자기 집의 잔디를 어떻게 할 지, 지붕의 색깔을 무엇으로 할 지 스스로 결정하며 그것이 공동체와 연관된 경우에 대화를 거쳐 합의를 만들어내지만 축하마을에는 이러한 과정이 없다.
다시 말하면, 통제를 통해 자유를 만들어내는 디즈니는 민주적인 대화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공간은 복잡하고,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머리 아픈 대화과정이나 논쟁이 뒤따른다. 하지만 디즈니가 만들어낸 공동체는 그러한 문제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 만들어진 환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통제에 잘 따르기만 한다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솔깃한 이야기면서, 또 한편으로는 섬뜩한 이야기다. 이것이 솔깃한 이유는, 만약 내가 축하마을에 살 수 있는 사람일 경우, 아주 강압적이거나 기분 나쁘지는 않은 통제에 따름으로써 깨끗하고 잘 정돈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 골치 아프게 생각하던 사회 문제들은 이 마을 안에서 큰 의미를 갖지 않으며,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들을 마주칠 일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섬뜩한 이유는, 나는 분명히 축하마을에 살 수 없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축하마을에 있는 고가의 집을 사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백인 중산층’과 거리가 먼 나로서는 문제 집단에 속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골치 아픈 것들을 해결하는 이러한 방식은 디즈니가 자신의 문화 상품에서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책에서 들고 있는 예는 디즈니의 영화 <굿모닝 베트남>이다.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전쟁이 가지는 역사적·정치적·윤리적 문제를 모두 제거한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상황을 조금 바꿔 생각하면 이런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한 영화사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때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영화는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은 거의 삭제하고 단지 등장인물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처럼 역사를 재구성한다. 그것도 순수함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말이다. 그 영화사가 어느 정도의 역사적 인식을 자신의 영화에 집어넣을지는 물론 자유겠지만 문제는 그들이 역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들은 역사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한다. 그들, 즉 디즈니에게 ‘순수함이란 역사의 불쾌한 측면을 제거하는 이념적 도구’라는 저자의 말이 이러한 디즈니의 방식을 간단히 압축해 준다.
축하마을에 세워진 축하학교의 교육과정 또한 이처럼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제거한 것 중 하나이다. 축하학교의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데는 여러 전문가가 참여했는데 그들은 대체로 교육심리학을 전공한 이들로 편중되어 있다. 그렇기에 축하학교의 교육과정은 다양한 방법론들을 가지고 있지만 교육을 사회와 관련지어 그 의미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육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할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계급, 불평등과 같은 불편한 문제들을 꺼내놓는 것을 디즈니는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관계만을 중시하는 교육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축하마을처럼, 사실 겉보기에 이 학교는 매력적이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모든 학교가 비슷한 학생 수, 똑같은 환경, 동일한 교육과정으로 교육받는 곳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일렬로 줄지어진 딱딱한 책상이 들어찬 교실이 아니라, 바닥 깔개와 쿠션 의자가 배치된 교실에서 학년에 상관없는 학습을 하고, 학생들의 학습을 도울 최신 시설이 갖추어진 학교. 이처럼 매력적인 모습을 가진 학교이기 때문에, 축하학교가 내보이지 않고 있는 모습들은 더욱 간과되기 쉬운 듯하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디즈니의 여러 모습들에서, 나는 자꾸만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간혹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는 날이면 학교에서는 어김없이 대청소를 시켰다. 평소 교실을 채우고 있었던 너저분한 물건들이나 밖으로 삐져나온 청소도구 같은 것들은 가차 없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날 만큼은 수업도 늘 풀던 문제집으로 입시 준비 공부를 하는 데서, 특별히 준비된 교육적이고 모범적인 수업으로 변신하곤 했다. 그 하루 동안은 학교가 깨끗하고 그럴 듯 해 보일지 몰라도, 장학사의 방문이 끝나면 학교는 본래 모습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것은 학교의 진짜 모습이 변한 것이 아니라 불쾌하고 해결하기에 어려운 문제들을 잠시 뒤로 숨겨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디즈니가 보여주는 모습 또한 이와 너무나 닮아 있다. 축하마을이나 축하학교, 디즈니랜드와 같은 곳은 언뜻 보기에 이상향처럼 보인다. 그곳에 있으면 행복하고 즐겁고, 늘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곳들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격리된 이상향이다.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즉 정치적이고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은 모두 그대로인데 디즈니는 다만 그런 문제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도록 꼬드긴다. 그런 곳에 영원히 사는 것이 가능할까? 당신이 돈이 있다면, 백인이라면,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유토피아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남겨진 현실의 문제로만 간주될 것이다. 현실의 그늘을 숨긴 채 밝은 부분만을 보여주는 디즈니, 그러면서 그것을 순수함으로 둔갑시키는 디즈니는 전혀 순수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