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돌이켜 보면, 제가 처음으로 베이킹이라는 것을 해 본 것은 프랑스의 기숙사에서 였습니다.
그 기숙사에서는 평일에는 식사가 제공되었지만 주말에는 학생들이 직접 음식을 해 먹었기에 간이 주방을 개방해 주었는데, 그리 크지 않은 주방에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 오븐이 두 개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오븐을 사용해 본 적이 없던 저는 호기심에서 믹스를 사 와서 머핀을 만들어 보았었는데, 그것이 제 베이킹의 맨 첫 걸음이었던 것 같아요 :)

그렇게 베이킹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제가 점차 깨달은 사실은, 저는 참 욕심이 많고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쿠키를 굽든, 빵을 굽든,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 내려면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반죽을 해 놓고 냉장고에서 숙성이 되도록 30분 정도 휴지를 시킨다거나, 빵 반죽이 발효가 되도록 1시간 정도 적정 온도에 놓아둔다거나 하는 것 말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 시간을 못 참고 일찍 반죽을 꺼냈다가 실패를 했는가 하면, 나중에는 기다리기가 싫어 아예 3가지 쿠키를 동시에 만들면서 기다리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난리를 치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바쁜 마음으로 쫓기듯 만드는 쿠키나 빵이 제대로 맛을 내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 같아요.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조금씩 저도 달라졌고, 이제는 빵이 발효를 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하며 진득하니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에 많이 가까워진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베이킹은 저에게 '도 닦는 일'이랍니다! ㅋㅋ) 아마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데에는, 오랜 기다림 끝에서야 만나게 되는 '맛'을 알게 된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채식을 하면서부터 계란, 버터, 설탕을 이용해 강하고 유혹적인 맛을 내는 종류의 빵들을 멀리하고, 거친 밀가루와 소금, 물과 효모 만으로 만들어 내는 거친 빵들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런 빵들을 짧은 시간에 만들어내는 것은 무리더라구요.

며칠 전 만들어 본 이 '무화과통밀보리빵'은 제 기다림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인스턴트 이스트를 쓰지 않고 건포도 발효종을 만들어 구워낸 빵이기에, 발표종 만드는 데 4일 정도, 1차 발효 하는 데 12시간이 걸렸으니 빵 하나 구워내는 데 5일은 족히 걸린 셈이지요. 그러한 오랜 기다림의 결실만큼 맛있었냐고 물으시면, 제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변명을 해야겠지만, 적어도 제 입에는 다른 어떤 유명 베이커리의 빵보다도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녀석이었답니다.

빵과 떡의 중간, 무화과가 듬뿍 들어간 통밀 보리빵


레시피를 소개하기에는 제가 너무 대충 - 계량도 하지 않고 휙휙 - 만들었기에, 그냥 과정만 보여드릴게요!

먼저 인스턴트 이스트 대신 사용할 건포도 발효종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유리병에 건포도와 물을 적당량 넣고 실온에 3~4일 정도 두면, 건포도가 둥둥 뜨면서 기포가 생기기 시작해요. 발효가 완성되니, 뚜껑을 열었을 때 마치 탄산음료처럼 보글 보글 방을 터지는 소리를 내더라구요. 효모가 활동을 잘 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건포도는 걸러낸 다음 빵 반죽하기로 들어갔습니다 :D

발효가 되면서 둥둥 떠오른 건포도들

위에서도 작은 기포가 보입니다


이번에는 통밀가루와 통보리가루를 1:1로 사용했습니다. 
'보리'하면 떠오르는 왠지 친근하고 구수한 느낌이 저는 참 좋은데, 슬프게도 반죽은 몹시 질어지더라구요.
가루류에 소금 약간, 조청 조금과 건포도 발효종을 넣고 적당하게 반죽을 해 주었습니다. 12시간 동안 상온에 내 버려 둔 반죽은 겨우 겨우 2배 정도로 부풀었는데, 이것을 덧밀가루를 써 가며 모양을 잡아 주고, 미리 물에 담가 부드럽게 만든 무화과를 듬뿍 올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무화과를 가운데 두고 반죽을 감싸서 예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으나, 만들다 보니 이 질척거리는 반죽은 그런 모양을 허용하지 않더라구요 =_= 그냥 거의 새롭게 반죽을 해서 동그랗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거기에다 칼집을 넣고 반죽이 타지 않게 밀가루를 뿌려준 다음, 다시 실온에서 2시간 정도 2차 발효를 해 주고 오븐에 집어넣어 익을 때까지 구워주었어요.

12시간 동안 1차 발효를 했어요

처음 반죽의 2배 정도로 부푼 거랍니다

반죽이 엄청 질어서 덧가루를 많이 썼어요

반죽 위에 무화과를 올리고 감싸주려고 하였으나

반죽이 너무 질어 결국 그냥 동그랗게 만들었어요

위에 덧밀가루를 뿌리고 칼집을 내줍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무화과통밀보리빵.
포슬포슬한 빵의 식감보다는, 묵직하고 쫄깃한 떡의 식감에 가까운 것 같았어요. 색깔은 그냥 통밀가루로만 만든 빵보다 훨씬 짙었고, 무화과를 듬뿍 넣었더니 곳곳에서 톡톡 무화과 씨가 씹혀서 씹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언니에게 시식평을 부탁했더니 '빵 같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다, 맛있다'는 반응이었어요. (나는 빵을 만들었건만.. 털썩 ㅠ_ㅠ)

오븐에서 적정 시간을 보내고 나온 통밀보리빵!

위아래의 덧밀가루들을 탈탈 털어냈습니다

속이 궁금해서 일단 반으로 잘라봤어요

대략 크기는 이 정도 :)

무화과들이 박혀 있고, 꽤 짙은 색

먹기 좋게 작은 조각으로 분할

다시 원형으로 늘어놓았어요

모양은 조각케익이지만 엄연한 빵!


정확한 레시피도 없이 대강 만들어 본 빵이지만, 그 결과는 그럭저럭 만족할 만 했고 무엇보다 과정이 참 재미있었어요.
건포도가 발효되는 것도, 곡물 가루들이 건포도 발효종과 만나 스르륵 부풀어오르는 것도 다 제 손을 벗어나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정말로 '살아있는' 뭔가를 대하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

아마도 오늘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번에는 좀 더 완성된 빵을 만들 수 있겠지요? 
이상, 언젠가는 제 입에만 맛있는 빵 말고, 다른 분들께도 자신있게 맛 보여 드릴 수 있는 빵을 만들고 싶은 곰파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