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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코이카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제 머리 속에는 페루라는 나라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미라는 새로운 대륙이 주는 신비감에다, 이제는 사라진 산꼭대기 도시에 살던 이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겹쳤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페루-한국어교육 티오가 나기를 기다리던 끝에 처음 지원했던 곳은 2010년 5차의 모로코였지만, 서류에서 똑 떨어진 이후 마음을 깨끗이 접고 다시 페루 한 나라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60기로 합격을 했을 때, 합격 자체도 좋았지만 더욱 기뻤던 것은 역시 그것이 바라던 페루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본 시간이 길었기 때문인지, 국내훈련에서 갑자기 페루에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가 받은 충격은 컸습니다. 사실 '해외봉사'라는 것만 놓고 본다면 어디를 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냐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속상하고, 섭섭하고, 억울했습니다. 페루에 간다고 해서 다른 곳보다 나은 환경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기대한 만큼 실망을 할 수도 있다는 말. 스페인어권을 원하는 것이라면 다른 나라들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 이성적으로는 이 모든 말들이 이해가 되었지만, 이상하게 전혀 위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철수랑 결혼하기로 하고 모든 준비를 다 해 놓고 있었는데 철수한테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고 옆 집 사는 영수나 철호 둘 중에 하나 골라잡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느껴졌거든요.

많은 고민 끝에 의외로 쉽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좋다, 페루가 아니라면, 이집트로 가자. 페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왜 여러 나라 중에서 특별히 이 나라가 저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지 저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사라진 이들의 흔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쓰이지도 않는 라틴어와 희랍어를 배워가며 옛 이야기를 통해 신들과 사람들의 삶을 엿보던 저의 성향은, 아마 다른 길에 올라서 있는 지금도 여전한가 봅니다. 아무튼, 국내훈련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여유롭게 이집트에 대한 책과 다큐멘터리를 찾아 보면서 저의 새로운 짝인 이집트에 대해 배워가는 중입니다. 아직은 피라미드, 이슬람, 나일강, 더위, 사막,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단편적인 것들만 기억이 날 뿐이지만요.

그리고, 아래는 힘들고 마음이 아팠던 때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편지입니다. 
         
당신이 페루에 가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유감입니다. 기어를 바꾸는 것은 분명히 매우 어려울 거에요 : 당신은 페루에 정신적으로 헌신했고 언어를 공부했는데, 이제 당신은 (페루와) 헤어지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이집트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느끼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서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페루에서 일어났을 일들에 대해 여전히 애도해야 합니다. (I'm sorry to hear that you won't be going to Peru. It must be very hard to shift gears: you made a mental commitment to Peru, studied the language, and now you have to "break up" and find a new love! Don't worry if it takes a bit of time to connect in the same way to Egypt, you still have to mourn what might have been in Peru.)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 주어서 정말 고마웠어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집착한다고 질책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미처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너무 빨리 쿨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