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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들어온 지 한 달 만에 코이카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협력요원들과 아인샴스 단원들 몇몇은 이미 이집트로 들어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언제가 될 지는 모르나 돌아가는 것은 확실하다,는 이야기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안개 자욱한 숲 속에 있다가 이제는 글자가 희미할 망정 낡은 표지판이라도 보이는 것 같아서, 다시 뭔가를 시작해 볼 힘을 얻었다. 그렇다고 아직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2월 10일 - 15일 (꽃동네)

일주일 남짓 생활한 애덕의 집

앞마당에 널려있던 시래기


지난 포스팅에서 꽃동네로 떠난다고 말을 했었다. 2월 9일 수요일에 대전을 거쳐 음성에 도착해서 삼촌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2월 10일 목요일 아침 일찍 꽃동네에 갔다. 랜덤으로 수녀님이 골라주신 곳은 '애덕의 집'이었는데 도착하기까지도 나는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 했다. 알고 보니 여성 부랑인들이 있는 곳이었고, 그 곳에서도 내가 일하게 된 '은총방'은 정신적 장애로 인해 다소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모여 계신 곳이었다. 첫 날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할 지도,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신없이 지나갔고, 둘째 날부터야 조금 도움을 드릴 수 있었던 것 같다. 9시 경에 목욕, 은총방 청소, 점심 먹을 준비, 건물 내에서의 걷기 운동, 간식 준비, 저녁 식사 준비 등으로 이어지는 스케줄 속에서 시간은 후딱 흘렀다. 떠나오는 날까지도 선뜻 하기 어려운 것은 기저귀를 가는 일이었다. 나는 기저귀 확인하는 시간만 되면 밍그적거리며 수녀님과 직원분이 능숙하게 기저귀가는 것을 보조(?)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지만, 처음보다는 나름 발전이 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어쨌거나, 은총방에서 봉사를 하는 동안 힘들었던 것은 몸이라기보다는 마음이었다. 그 곳에 있는 분들은 내가 이제까지 만나온 사람들과는 정말 많이 달랐다. 첫째, 말로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빽빽 지르거나 내가 알지 못 하는 이유로 막 화를 내며 자신의 머리를 쿵쿵 쥐어박는 분 앞에서 나는 당황스러웠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구 성질을 내며 '이 년아!' '나가 죽어!' 같은 소리를 지르는 이유가, 단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내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 분들은 나와, 또 모든 사람들과 너무나 닮은 모습이기도 했다. 어쩔 때는 순한 양이다가 뭔가 틀어지면 자기 분에 못 이겨 마구 성질을 내며 벽을 치는 언니. 먹을 것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사람 밥을 뺏아먹거나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밥풀을 주워먹고, 심지어 양치를 위해 칫솔에 묻혀 놓은 치약을 먹는 언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중얼하다가 애기 목소리로 '아저씨~ 아저씨~'하고 반복하는 언니. 은총방 언니들을 보면서, 사실은 내 안에도 이런 모습들이 숨어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맛있는 걸 보면 막 먹고 싶고, 이중 또는 삼중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다만 나는 주변의 시선을 인식하고 있기에 그것들을 잘 누르는 방법을 교육받고 행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떠나오는 날까지도 꽃동네에 계신 분들이 특별히 '더'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왜 가끔 TV에 보면 장애를 가진 분들이 환하게 미소짓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 분들이 더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그런 것 있지 않나.) 그 분들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내 마음과 노력을 알아주면 기쁘고, 체온을 전달할 때 뭔가 마음이 따뜻해지다가도 빽빽 소리지르면 밉게 보이는.

예상과 달리, 내가 예정했던 일주일을 다 채우지 못 하고 꽃동네를 '탈출'하게 만든 것은 애덕의 집에 '계시는 분들'이 아닌 다른 봉사자들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일정이 끝난 오후 여섯시부터는 평화롭게 책을 읽으며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2월 14일 월요일에 도착한 예비 고3 봉사자 몇 명이 '무리'를 이루면서 나의 평화는 깨어져버렸다. 새벽 한 시가 될 때까지 소곤소곤 떠들던 그들은, 나를 비롯해 조용해 달라고 말했거나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다. 그 날따라 잠을 이루지 못 하고 있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음 날로 짐을 싸서 삼촌댁에 가기로 결정했고, 수요일이 아닌 화요일에 꽃동네를 떠나왔다.


2월 16일 - 현재 (생극 삼촌댁)

그 이후로는 음성 근처 생극에 사는 예비 고3, 고2 사촌동생들의 공부를 봐 주며 지내고 있다. 며칠 전 개학을 하기까지는 봄방학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매일 대략 열 네 시간의 자습시간이 있었다. 계획을 짠 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지 체크하고, 언어와 외국어는 오답풀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단어는 정확히 외웠는지 점검을 하는 등이 나의 역할이었다. 아마도 나의 사랑스러운 사촌동생들은 몸과 마음이 꽤나 힘들었겠지만, 그렇게 한 덕분에 이제는 공부하는 습관이 몸에 좀 배인 것 같아서 한결 마음이 놓인다. 동시에, 평소 만들어보고 싶었던 각종 요리 - 채식만두, 부추만두, 구운야채샌드위치, 오이샌드위치, 두부강정, 버섯샤브샤브, 두부스테이크, 통밀찐빵, 애플시나몬토스트 등등을 사촌동생들이 공부하는 동안 만들어 함께 먹기도 했다 :) (지금 생각해 보니 당근과 채찍이었던 것일까) 그 외에는 잉여인간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게, 미드 '프린지' 시즌 1-3,  '빅뱅이론' 시즌 1-4, '위기의주부들' 시즌 1을 모두 해치웠고, 유일하게 생산적인 활동으로 '모자뜨기 캠페'에 동참하여 어설픈 뜨개질로 아프리카, 네팔 등의 신생아를 위한 모자를 두 개 완성했다.

방울 달아 완성하기 전

왼쪽 모자에 방울 달아 완성

첫 번째로 뜬 모자

좀 네모낳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함

두 번째로 뜬 모자

처음 뜬 거에 비하면 많이 낫다


코이카에서 온 메일을 읽은 뒤로 아랍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 아직 시작은 하지 못 했다. 한창 잘 돌아가던 압력솥에서 김이 빠져버리면, 다시 불을 붙여 추를 돌게 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법이다. 처음에 이집트에서 돌아와서는 대체 왜 나에게는 이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생겨나는 것인지 많이 속상했었고,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는 것을 낭비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이 시간 동안 충실하게 놀자, 좀 잉여스러워져보자'가 그 동안의 모토였는데, 역시나 아직도 의미나 성장하는 기쁨이 없는 일을 하는 것은 나에게 출처를 모를 죄책감을 들게 하는가 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어떤 때는 그냥 그 시간을 잘 흘려보내는 것이 가장 강하고 현명한 사람의 방식일 수도 있다고 위안해 본다.

내일부터는 좀 더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찾아서 해야겠다. 이집트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한국에서의 '휴가'를 잘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