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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7일 월요일 ~ 7월 3일 일요일


업무

1. 처음 룩소르에 내려와서 기관장을 만났을 때 부탁한 것이 바로 교실에 에어컨을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어 교실이 4층에 있다 보니 에어컨이 없이는 너무 더워 여름에 보충수업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약 세 달이 지난 지금, 여전히 한국어 교실에는 에어컨이 없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흔쾌히 에어컨을 달아주겠다고 이야기했고, 한 달 전 쯤부터 자주 찾아가 닦달을 하기 시작하자 일주일 안에 해결하겠노라 큰소리를 쳤고, 그러고도 여전히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교실 모습에 황당해서 또 찾아갔더니 일단 급한 대로 이동식 에어컨을 교실에 갖다주겠다고 했다. (사실 이렇게 간단히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아래의 허접한 송풍기였다. 에어컨이 아니라, 소음과 함께 시원한 바람인지 따뜻한 바람인지 모를 바람이 나오는 데다 뚝뚝 떨어지는 물 때문에 교실을 한증실 분위기로 만들고 마는. 이 광경을 보기 전에 읽은 메일 한 통이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 폭발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폭발의 결과로 여름 보충수업도 공중분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70년대 한국에 와 어느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에릭 아저씨는, 에어컨 설치에 관한 기관 측의 태도에 불만을 터뜨린 나의 메일에 이런 말을 해 주셨다. '그 당시 한국의 교실은 너무 추워서 수업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말 열악한 상황이었는데, 담당자를 찾아가서 이런 저런 것들을 부탁하면 절대 그 사람의 입에서는 No라는 말이 나오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체면을 중시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한국을 찾아온 손님에게 안 된다고 대답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네가 속한 기관도 그런 사정이 있을지 모른다. 모든 교실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데 한국어 교실에만 설치를 해 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이들에게는 에어컨 없는 교실이 당연한 것인지 한 번 확인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 불공정한 대우라면 거기에 대해서 다른 조치를 취해야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사실 이 메일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교실에 에어컨을 설치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교실의 사정은 모르지만, 일단 기관장실이나 회의실에는 좋은 에어컨이 달려있었기 때문에-) 기관 측의 입장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나는 한 발 후퇴했고, 예산이 부족하다는(근데 왜 이걸 이제야 말하냐고!) 기관장의 말에 그러면 대신 에어컨이 설치된 교실에서 수업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이야기해서 보충수업은 2층에 있는 다른 교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세 달 정도에 걸친 이 에어컨 투쟁은, 비록 완전한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진짜로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2. 이번 주 토요일부터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시작했다. 가장 큰 목적이 TOPIK 시험을 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토요일에는 먼저 17회 초급 TOPIK 모의고사를 보았는데, 역시나 점수는 커트라인 한참 아래였다. 이번에 중급 시험을 보는 4학년 B반 아이들은 초급을 가볍게 통과할 정도의 점수를 받았지만, 그 외의 아이들은 정말 독하게 공부해야 겨우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부터는 수업 계획 짜고 자료 만드느라 꽤 바빠질 듯 :)   


생활

화요일에는 갑자기 룩소르 전역에 물이 안 나와서 아침에 고양이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섰다. 쌀램스쿨이라는 곳에서 여름 동안 매일 저녁마다 학생들을 위한 클럽을 운영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뭔가 할 일이 있을지 생각을 해 보는 중인데, 목사님이 그 학교 선생님들을 소개해 준다고 하셔서 함께 인사를 하러 가게 된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늘 그렇듯 기다리는 데 한참, 별 이야기 없이 차 마시면서 한참,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학교를 나왔다. 일단은 목요일 저녁에 학생들이 단체로 선생님들이 준비한 게임 같은 걸 한다고 해서 그 날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단수가 되어서 집에 가도 밥 해 먹기 어려운 상황이라 목사님 댁 식구 및 룩소르 단원들과 함께 근처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생각해 보니 룩소르에 와서 먹은 것 중에 가장 비싼 밥이 아니었나 싶다. 여러 종류의 샐러드가 있어서 나름 만족.

호텔 로비에 앉아서 찍은 사진

신선한 샐러드와 빵이 가득한 호텔 뷔페, 50기니


목요일에는 샘하우스에 가서 아랍어 공부를 했다. 이 날은 주먹밥을 만들어갔는데, 이제까지 내가 만들었던 것 중에 제일 맛있다고 해서 이집트 사람의 입맛을 조금 파악할 수 있었다. 아랍어 공부를 마치고 저녁 8시 쯤에는 쌀램스쿨에 가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나는 낯가림을 좀 하는 편이다보니 아이들과 쉽게 친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계속 찾아가서 한 마디 두 마디 나누다 보면 조금씩 익숙해지겠지 싶다. 뭐든 한 번에 짠 하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 법이니까, 그냥 한 번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기다려야지 :D 

밥과 토마토 소스의 감자요리

렌즈콩으로 만든 샐러드

내가 만들어 간 주먹밥

밤이라 조명을 켜고 여러 게임을 했다

참가자는 주로 초등학생

끝난 뒤에도 남자 아이들은 축구를 계속했다


이번 주에는 금요일 성경공부가 없었고, 일요일에는 성당이랑 교회에 갔다가 여행에서 돌아온 J언니와 함께 한국어 사무실에 필요한 물품을 사러 문구점에 갔었다. 볼펜, 테이프, 스테이플러 심 등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왕창 주문했고 다음 날 배달받기로 했다. 월요일에는 한국에서 보낸 현장지원물품도 이고스로 배달 올 예정이라 바쁜 하루가 될 것 같다.
 
아, 룩소르에 내려와서 처음으로 통밀가루를 발견했다. 통밀가루로 와플이랑 팬케이크도 만들고, 모카스콘도 구웠다. 입맛이 확실히 변한 것 같은 게, 예전에는 보들보들한 백밀빵이 맛있었는데 이제는 까끌하고 거친 통밀빵이 아니면 먹는 듯한 느낌이 안 든다고나 할까. 아무튼 통밀로 만드니까 훨씬 고소하고 맛있는 빵이 나온다 :) 여기에서는, 정말 한가득 쌓여있던 물건도 어느 날 슈퍼에 가 보면 하나도 없이 싹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여분의 통밀가루를 좀 사서 집에 보관해놓았다.

통밀 와플과 무화과

통밀 팬케이크와 호두, 무화과

통밀모카스콘

초코칩이 쏙쏙 박혀서 맛나다

목사님 댁에도 좀 갖다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