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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1일 월요일 ~ 11월 27일 일요일


업무

1. 1학년 : 요즘은 좀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매 시간 이전 수업에서 배운 것을 칼 같이 확인하는 대신, 복습은 하되 잘 모르는 것은 몇 번이고 다시 가르쳐주자고 마음을 먹으니 훨씬 부드럽게 학생들을 대할 수 있는 것 같다. 아직 모음 ㅏ와 ㅐ를 헷갈려하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잘 따라하고 있고, 4학년 학생들보다는 발음이 괜찮으니까(이건 정말 슬픈 일이다) 일단은 목표 달성. 그런가 하면 학생들과의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몇 가지 일도 있었다. 한 학생이 콥틱(이집트 기독교) 축제에 가느라 하루 수업에 못 왔었는데 다음 수업에 오면서 내 선물을 사 왔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나를 기억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고 한편으로 학창 시절 내내(심지어 대학교 때까지) 좋아하는 선생님께는 이런 저런 선물을 드렸던 내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그랬다. 머리에는 자극을, 마음에는 감동을 주시던 선생님들이 그립고, 다시 그런 분들을 만나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좋은 학생이 되어 배우는 일을 하고픈 욕심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가르치는 이의 자리에 서 있으므로 본분을 잊지 말 것, 그리고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다 할 것. 고마운 학생들이 있지 않은가.  

학생이 사 온 선물

성 조지라고 적혀 있다


목요일 수업에서는 학생들 한 명씩 본인 이름을 들게 하고 사진을 찍은 다음 단체 사진도 찍었는데 생각 외로 너무 좋아했고, 나와도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려서 좀 놀랐다. 마치 교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수업에서 학습자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가르칠 내용이나 방법에 더 흥미가 가는, 본질적으로 부족한 교사이지만 이런 상황에 서면 학생들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한국어 배우는 '기계'가 아니라 각자 다른 성격을 갖고 있고 매순간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 나로 인해 학생 한 명의 삶이라도 풍성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영예인 것을.

한글쓰기 연습 종이

틀린 게 없을 때 찍어주는 도장

1학년 학생들 단체 사진


2. 3학년 : 몇 번 수업에 빠지던 여학생 와르다가 오랜만에 수업에 나왔는데 그래도 빠지는 동안 공부를 아예 놓았던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3학년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일절 잡담하는 일이 없어서 수업 분위기가 참 좋다. 어떤 선생님들은 좀 더 활기찬 학생들을 좋아하겠지만, 나는 수업 내에서 내가 허락하지 않은 때에 수업과 관계없는 내용에 대해 조잘거리다가 내 이야기를 놓치는 것은 못 보는 나쁜 선생님이어서 아예 조용한 학생들을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매번 보는 쪽지시험에서도 4학년 학생들보다 오히려 평균 점수가 좋아서, 3학년 학생들에게는 추가로 연습문제를 내 주어서 지속적으로 복습을 하는 가운데 기본 내용을 좀 응용해 볼 수 있도록 할 참이다.
 
3. 4학년 : 슬픈 4학년. 과제는 잘 해 왔으나 쪽지 시험을 보면 점수가 늘 그저 그렇다. 빡세게 공부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 할 마음이 없는 건지, 사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학생 두 명은 수업에 온 횟수와 안 온 횟수가 비슷한 것을 보면 학교에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 4학년 학생들에게 적응이 되어서 수업 시간에 열 받는 일은 아주 많이 줄었다. 몇 번 가르쳤던 걸 몰라도 그냥 다시 반복하는데, 이게 '이해'의 단계인지 '포기'의 단계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짧은 글에서 모르겠다는 말을 세 번이나 썼다, 헛.)


생활

수업 외에는 운동 하고 책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요즘 읽고 있는 것은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인데, 책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일반적인 행복이 아니라 '행복한 노년'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과업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냥 짐작으로 쓴 책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젊은 시절부터 노인이 되기까지 꾸준히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실제 사례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책을 읽다 보면, 실제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젊었을 때 혹은 나이가 들었을 때 물질적으로 여유로운가' 이런 문제가 아니라, 힘든 상황을 마주했을 때의 태도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혜로운 선배에게 삶의 조언을 듣는 듯한 느낌으로 읽고 있다.

요즘 카이로에서는 시위가 꽤 크게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다음 주면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시작되는데, 그것을 앞두고 군부가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민간 정부에 모든 것을 양도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가고, 그 시위가 격렬해지는 것을 보면서 이집트로 오려던 마음을 바꾸는 외국인들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다만, 이 곳은 관광이 주 산업이다 보니 그런 것에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어서 시위가 계속되더라도 부디 다치는 사람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ACE에 가면서 이번에는 타히니(중동의 참깨로 만든 페이스트)가 듬뿍 들어간 브라우니를 구워갔다. 그냥 브라우니와는 좀 다른 향이 있기 때문에 혹시 사람들이 안 좋아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영국 사람들도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만든 것을 먹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너무 달지 않아서 좋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정말 설탕 단 맛 100%의 과자들을 먹는 이집트인들의 입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너무 단 것이 몸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주위의 사람들이 원래 그렇게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 내년 1월 6일, 그러니까 콥틱(이집트 정통 기독교) 크리스마스 때 까지 콥틱 사람들은 단식을 하는데, 이 단식이라는 것이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거의 비건(완전채식)과 같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 간 브라우니에도 버터, 계란, 우유 이런 게 들어 있는지 걱정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원래 그런 거 안 먹기 때문에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고 했더니 좋아했다. 채식이라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꼭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날 ACE에서는 아침에 태어났다는 새끼 양도 구경했고, 고양이 개 밥 주기, 청소, 고양이 털 빗기기 등 잡다하지만 꽤 많은 일을 하고 왔다.

아침에 태어났다는 새끼 양

옆에는 엄마 양

직원들은 뭔가 의논 중


브라우니 외에는 땅콩버터 초코칩 스콘을 구워서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땅콩버터를 없애보자는 의도에서 만든 스콘이었는데, 굽고 나니 고소한 땅콩버터 향과 중간 중간 박힌 초코칩이 잘 어울려서 꽤 성공적이었다. 화요일에 같은 기관에서 일하는 일본인 봉사단원 리에와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때 조금 포장해서 리에에게도 선물해 주었다. 리에는 이집트에 오기 전 태국에서도 일본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그 곳에서 너무 좋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 반면 여기에서는 워낙 속고 당한 일이 많아서 좀 지쳐있는 것 같았다. 특히 지금은 함께 일하던 이집트인 선생님이 일본에 연수를 받으러 가서 혼자 세 학년을 가르치고 있는 상황이라 수업 준비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고 있어 보기 안타까웠다. 방학이 되면 좀 더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밥도 먹기로 했다.
 

땅콩버터 초코칩 스콘

이렇게 포장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일요일은 대림 첫 주일이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대림절을 맞이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이 날 아침부터 몸이 덜덜 떨리고 추워서 교회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날아왔다. 그 이후로 종일 침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정도로 아팠다. 근처에 사는 간호단원 언니가 팔에 수액도 꽂아 주고 죽도 두고 가서 밤이 되었을 즈음에는 그래도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었다. 감기 몸살이었는지 장염이었는지 정확한 병명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초를 하나 밝힌 대림 1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