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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먹는 호랑이의 이야기, 그 첫 번째. 콩

세상에 콩 좋아하는 애들도 있을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리는 거 없이 뭐든 잘 먹는 아이였지만 (아, 파와 양파는 예외야. 이건 엄마도 안 드시는 거라 편식한다고 혼 날 일도 없었지!) 콩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아. 그 때야 식탁에 올라오는 콩이라고 해도 밥에 들어가는 게 다였던 것 같은데, 일단 콩밥이 나오면 나는 콩 먼저 콕콕 골라먹었어. 콩을 남길 수는 없으니 대신 콩 먼저 먹어서 깨끗해진 흰 밥을 먹는 길을 선택한 거지. 싫은 거 먼저 해치우고 좋아하는 건 아껴두는, 그런 아이였나 봐. 지금은 콩 반 현미 반인 밥을 짓고 콩을 먼저 골라 먹는데, 콩이 싫어서가 아니라 맛있어서 먼저 먹어. 십 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졌네, 내가.

그나마 어릴 때 좋아했던 콩은 완두콩이었어. 예쁜 연두색깔 콩이 달달하니 맛도 좋잖아. 아, 자라면서 점차 콩자반도 좋아하게 된 걸로 기억해. 그런데 그건 콩 자체 보다는 달달하고 짭조름한 양념 때문에 잘 먹었던 것 같기도 해. 그러고 보면 두부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콩과 별로 친해지지 않았던 건 아마도 식감 때문이었을 거야. 부드러운 두부와는 달리 콩은 씹으면 입 안에서 깔깔하게 돌아다니는 느낌이 드니까 말야. 고소하고 담백한 맛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는지도 모르지.

채식을 하면서부터 나의 주 단백질 공급원은 콩이 되었고 그래서 우린 가까워졌어. 사실 채식을 하기 전에 ‘검은콩 다이어트’라는 걸 먼저 했었거든. 그 식단에 따르면 아침에는 늘 삶은 콩을 먹기 때문에 일단 인터넷을 뒤져 좋은 콩을 찾아내 주문했지. 껍질은 까맣지만 속은 연두색인 '서리태'라는 콩을 주문해서 삶아 보았는데, 나는 그 때 처음 알았어. 그냥 아무 것도 없이 삶기만 한 콩도 맛있을 수 있다는 걸 말야. 너무 푹 익히지 않은, 그렇지만 깔깔할 정도로 설익지도 않은 콩에서는 단 맛이 나더라구. 물론 설탕의 단 맛 같은 건 아니지. 콩 자체에서 나오는 연한 단 맛 같은 거였어. 이렇게 콩 세계에 입문한 나는 점차 범위를 넓혀 가기 시작했어. 백태, 그러니까 메주콩을 삶아 만든 콩물에 소금을 조금 타서 마시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어. 볶은 서리태는 콩의 고소한 맛을 정말 잘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고 말이야. 볶은 콩가루는 떡을 찍어 먹어도 그냥 먹어도 맛있었어. 하지만 덕분에 체중 감량에는 오히려 마이너스였던 것 같아.

밥에 놓아먹거나 간장, 된장, 두부를 만들어 먹는 게 한국에서 주로 콩을 먹는 방식이라면 외국에서는 콩을 가지고 샐러드, 스튜를 만들거나 부드럽게 갈아 찍어먹을 수 있는 소스를 만드는 식으로 활용을 하는 것 같아. 사용하는 콩도 좀 달라. 그 많고 많은 콩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병아리콩(chick pea)과 렌즈콩(lentil)이야. 병아리콩은 폭 삶으면 부드럽게 씹히고 살짝 밤 같은 맛이 나는데, 이걸 으깨서 양파와 향신료를 섞어 튀긴 팔라펠(falafel)로 만들어 먹어도 맛있고, 아니면 참깨 페이스트와 마늘, 레몬 등을 넣어 갈아 만든 허머스(hummus)로 먹어도 맛있지. 그냥 카레에 넣기만 해도 감자 당근 양파의 심심함을 보충해 주면서 단백질도 섭취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고 말이야. 그런가 하면 렌즈콩은 새끼 손톱 사분의 일 만한 크기의 작은 콩인데 볼록하게 생긴 모양이 렌즈와 닮았다고 그런 이름이 붙은 모양이야. 인도나 중동에서 특히 많이 사용하는 콩이지. 팥이나 녹두와 좀 비슷한 맛이 나는 것 같은데 백태에서 나곤 하는 콩 비린내가 없고 익히면 그냥 고소한 냄새가 나. 프랑스에서는 녹색 렌즈콩을 가지고 샐러드나 육류 요리의 곁들임 음식을 만든 것을 종종 보았고, 여기 이집트에서는 갈색과 주황색 렌즈콩을 주로 수프나 샐러드에 사용하더라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쪼개진 주황색 렌즈콩으로 끓인 수프야. 렌즈콩을 듬뿍 넣고, 거기에 양파와 당근, 감자를 넣어 끓인 수프인데 커민이라는 향신료의 향이 잘 어우러져서 맛이 좋아. 음, 커민은 향이 독특하고 강해서 한국 사람들 중에는 싫어하는 사람들도 좀 있어. 토마토를 넣어 만들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만들면 색깔이 붉은 색으로 변하고 무엇보다 렌즈콩 자체의 맛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에 난 넣지 않는 편이 더 좋더라. 부드럽게 갈아 만든 이 수프를 뜨겁게 데운 다음, 입천장이 까질 만큼 바삭하게 구운 통밀빵을 수프에 찍어 부드럽게 해서 먹는 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점심 메뉴야. 수프는 한 번 끓일 때 많이 만들어서 1인분씩 통에 담아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다가 먹기 몇 시간 전에 꺼내어 데워 먹으면 번거로울 일도 없어.

'저 사실 풀을 먹어요.'하고 말하면 간혹 걱정스러운 눈으로 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어보는 이들이 있어. 고기를 먹고 싶지 않은지, 또는 고기를 안 먹어서 힘이 빠지지는 않는지 말이야. 물론 이십 년 넘게 고기를 먹고 살아온 호랑이인 내가 고기 생각을 조금도 안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야. 그렇지만 너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어. 또, 고기를 먹지 않아서 힘이 달린다는 생각은 할 일이 없을 정도로 지난 2년 동안 건강하고 활기차게 잘 살아왔고. 그 대신 간혹 집을 떠나서 며칠 동안 콩을 못 먹고 지낼 때면, 기운이 없다기보다 뭐랄까, 기분이 축 처지는 느낌이 들어.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다양한 채소와 함께 풍부하게 맛을 낸 콩 요리를 먹어줘야지, 그게 빠지면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옛날부터 콩은 '밭에서 나는 고기'인 동시에 '가난한 자의 고기'라고 불렸대. 구하기 힘든 동물성 단백질 대신에 콩으로 단백질을 섭취했던 거지. 그런데 점차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고기와 더불어 동물성 지방의 섭취가 늘어나면서 각종 성인병이 문제가 되니까, 이제는 다시 '가난한 식단'으로 돌아가려는 걸 보면 아이러니해. 그러고 보면 예전에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먹던 것들이 몸에는 더 좋았던 게 많은 것 같아. 보드라운 흰 빵이 아니라 통 곡물로 만든 거친 빵이라든가 부의 상징인 흰 쌀밥 대신 보리와 조, 콩 등을 섞은 잡곡밥처럼 말이야. 세계의 한편에서는 햄버거와 감자튀김 같은 패스트푸드와 탄산음료를 버리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려는 움직임이 있는 반면, 아프리카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패스트푸드가 평생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일 수도 있을 거야. 단지 경제적인 이유로 그걸 선택할 수 없는 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으니 이는 개선되어야겠지만, 그 사람들이 (잘 보완한다면) 더 균형 잡히고 건강한 것일 수도 있는 자신들 고유의 음식을 버리고 서구의 육식 중심 식단을 받아들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한국에서도 얼마 전부터 콩의 좋은 점이 많이 부각되면서 다양한 콩 요리가 소개되고 있는 것 같아. 신토불이라는 말처럼 우리 땅에서 기른 안전한 콩이 가장 좋겠지만, 콩과 친하지 않은 당신이라면 한 번쯤 색다른 이국의 콩으로 요리를 해 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콩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지도 몰라.


뱀발. 몇 년 전 기사이지만 아프가니스탄에 콩을 심는 분의 이야기도 있어. 아하, 여기 애들은 콩을 좋아하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