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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16호 _ 나는 왜 공부하는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기 위하여
 
- ‘에서 우리,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공부

 


은파 piyabba@gmail쩜com

가르치고 배울 때 눈이 반짝이고, 느리지만 조금씩 세상을 바꾸는 일에 가슴이 뜁니다. 멀리 이집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돌아와 지금은 한국 안과 밖의 교육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곰파라는 별명으로 블로그(gomp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공부와 유예된 행복
 

우리 집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아주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지만 부모님,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한 까닭에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20대를 보낸 엄마는, 언니와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를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보내겠다고 결심하셨던 것 같다. 집안 형편이 남들보다 썩 좋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고, 언니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공부 리듬이 흐트러진다는 이유로 가족이 함께 휴가를 떠난 일도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엄마가 집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며 내 또래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그 시간에는 나도 옆에 앉아 공부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산수 문제집을 풀기 싫어 베꼈다가 엄마한테 걸려서 혼이 났는데, 그걸 다 지우고 다시 풀다가 또 답을 베껴서, 정말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은 기억이 있는 것을 보면. 어렸을 적에는 좀 더 호기심이 많고 산만하며 게을렀던 나는, 이런 환경 속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점차 차분하고 꼼꼼한 우등생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생활의 일부와 같았던 공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미래의 행복으로 가는 문을 열 열쇠가 되었다. 수업에 들어오는 선생님들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고, 우리들은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우리 집도 IMF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고, 부모님이 자세히 말씀은 안 하셔도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번듯한 직장을 갖고 돈 걱정하지 않고 살려면, 신분 상승을 하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습관이 되어 있어도 공부한다는 것은 재미없고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이처럼 공부가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내면화하면서 지루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흥미를 가지려 노력했다. 물론 어떤 때는 공부를 통해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문학 작품을 통해 다른 삶을 만날 때면 평소보다 세차게 가슴이 뛰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는 단편적인 지식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한 채 있다가 금세 죽은 지식이 되어 빠져나가 버렸고, 그 자리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들인 다른 지식들이 들어섰다. 나는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미루어 두었던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공부와 의 행복
 

대학에 들어온 기쁨도 잠시, 어른들은 대학에만 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내용이 달라졌을 뿐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비슷한 배경을 가진 친구들과 헤어져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격차를 느낄 때가 많았다. 공부만 잘하면 성공하고 잘살 수 있다는 것은 옛말이었다. 게다가 대학에 들어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직시하게 되면서, 이런 세상에서 과연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가능은 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당장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낮은 학점을 감수할 배짱이 없어 꼬박꼬박 수업을 듣고 열심히 과제를 했으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했다.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지금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쟁취한 것들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고, 지금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 후회할까 두려웠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혼란 속에서 계절학기 수업까지 신청해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곤했던 1학년 여름방학, 우연히 읽게 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나에게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사는지 물음을 던졌고, 그 후 나의 삶은 달라지게 되었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했다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필요 이상으로 바쁘고필요 이상으로 일하고필요 이상으로 크고필요 이상으로 빠르고필요 이상으로 모으고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박민규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일단은 너무나 높은 산처럼 보이는 이 사회의 문제를 잠시 놓아두고 나의 문제부터 먼저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아 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구하기 위해 삼천포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전공인 국어교육 수업은 최소로 듣고, 주로 인문대에서 문학과 철학 교양 강의를 들었다. 조선시대의 지성사, 한국 문학과 여성, 서양 미술사 입문과 같은 강의를 통해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살아간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았고, 나보다 앞서 비슷한 고민을 했을 선배나 선생님들을 직접 찾아가 조언을 청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재미를 느꼈던 것은 서양고전학 수업들이었다. 라틴어와 희랍어 같은 고전어를 배우고, 희랍비극, 희랍로마신화, 고대 희랍로마문학과 같은 강의를 부지런히 들었다. 예전부터 문학을 좋아했던 내가 서양고전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문학 작품은 다른 이의 삶을 경험하고 세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통로였다. 사회과학 서적이나 역사책에서는 단 한 줄로 서술될 내용이 문학에서는 한 권의 소설로 풀어서 이야기되거나 한 편의 시로 방식을 달리해 노래됐고, 그러한 소설과 시를 통해 비로소 나는 내가 아닌 존재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9.11 테러를 소재로 한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속 아홉 살 소년 오스카를 통해 내게 9.11은 단지 3,000명의 사람이 죽은 사건이 아니라 ‘3,000개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진 사건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서양고전학에 빠져든 것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그 옛날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남겨 놓은 서사시와 희곡에서 이전에는 몰랐던 매혹적인 세계를 만나고, 그 낯선 세계 속에서 내가 가진 고민을 똑같이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금씩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참 좋았던 것 같다. 이렇게 계속 서양고전학을 공부해 나가는 것이 내가 행복하게 사는 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에 대한 확신을 갖고자 하는 마음은 결국 먼 길을 떠나게 만들었다. 3학년 2학기에는 휴학을 하고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떠났는데, 일단은 프랑스어를 배워 앞으로 서양고전학을 공부하는 데 밑거름으로 삼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다른 세상을 직접 경험하면서 우리나라와 같이 모두가 더 빨리 달리고 더 많이 일함으로써 결국은 더 힘들어지는 삶 대신 다른 방식으로 살 수는 없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9개월은 그러기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훨씬 여유 있게 삶을 즐기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언젠가는 우리도 이런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가 제3세계와 환경에 빚을 지고 있는 것임을 알지만, 남들의 시선보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삶의 기준으로 삼고 각자의 개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은 여전히 내가 본받고 싶은 부분이다.
 

프랑스에 이어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갔다 2년의 휴학을 끝내고 학교로 다시 돌아오니 본격적으로 진로를 선택해야 할 때가 되어 있었다. 국어교육과 학생이었지만 학교로는 가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배우고 싶지 않은 학생들을 붙들고 수업을 할 수 있을 만큼 내가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없었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들에 대항해 목소리를 내기에는 겁이 너무 많았으나, 그렇다고 못 본 척 넘길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서른 명이나 되는 학생들과 수업에서 만나는 것, 더 많은 학생들과 관계를 맺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나와 학생들,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서양고전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혼자 하는 공부를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여러 해 동안 여러 곳을 헤매며 깨닫게 된 중요한 사실 하나는, 나는 공부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길 좋아하고 알게 된 것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하며,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더불어 전에는 너무 높아 보여 잠시 내려놓았던 사회에 대한 고민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고민에서도 교육은 빠질 수 없는 주제였다.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사회구조를 한 번에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교육을 통해 나만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당장 일을 시작하거나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공부를 좀 더 분명히 구체화할 필요가 있었고, 여기에 타문화에 대한 관심, 국어교육이라는 전공, 내가 가진 능력을 의미 있는 일에 써 보고 싶은 마음이 더해져 장기 해외 봉사를 나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공부와 의 행복 - 이집트와의 만남, 혁명 그리고 교육에 대한 고민들
 

20108월에 졸업한 후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해외 봉사단에 지원한 나는 그해 12월 한국어 교육 단원으로 이집트에 파견되었다. 일단 파견이 되면 두 달간 현지 적응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 시기가 바로 20111, 아프리카/중동 일대에 불어온 민주화 바람이 이집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였다. 125일에 있었던 대규모 시위 이후 상황은 심각해져서, 시위의 중심지인 타흐리르 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단원 숙소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총소리가 들렸고 주변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들도 관찰되었다. 금방이라도 큰일이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사람들이 슈퍼에서 물과 비상식량을 사서 비축하는 모습도 보였다. 며칠 뒤 본부에서 단원들을 불러들이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집트로 떠난 지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대피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생각보다 빨리 무바라크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시민들의 혁명은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고, 나는 3월 말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 201212월까지 룩소르관광호텔고등교육원에서 가이드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집트에서는 이제까지 해 왔던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의 공부를 하고 돌아온 것 같다. 평소처럼 책이나 강의, 사람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뚜렷한 대상이나 목적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내 주변을 관찰하고 새로운 세계와 사람들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공부였다고나 할까.
 

처음 이집트에 갔을 때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한 것은 시간이 너무 많다는 거였다. 나에게 할당된 주당 8시간의 정규 수업과 개인적으로 개설한 보충수업, 수업 준비를 위한 시간을 제외하고도 늘 여유 시간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바쁜 것이 일상이었고, 꼭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늘 사람이 있거나 텔레비전과 인터넷처럼 시간을 채워 주는 도구들이 있었는데, 이집트에서는 만날 사람도, 볼 만한 프로그램도 별로 없고 인터넷도 빠르지 않다 보니 정말 별로 할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은 내가 봉사단원이라는 이름만 달고 있을 뿐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의기소침해지고, ‘도대체 나는 뭘 하러 여기 왔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현지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되고 뭔가를 이루겠다는 욕심을 차츰 내려놓으면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참석했던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한 정보통신기술을 주제로 한 포럼에서 현지 사람들은 해가 지면 할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의 이집트 생활을 돌아보아도 정말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이집트는 생활환경이 좋은 편이라 전기를 사용해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지만, 내가 가장 행복하게 보낸 저녁 시간들은 옥상에 올라가 어둠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누워서 이웃에 사는 일본인 친구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모두가 바쁘게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시간을 쏟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이때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이집트는 한국을 비춰 보는 거울이 되어 주기도 했다. 내가 학교에 처음 파견되었을 때, 한국어 수업을 하는 교실에 갔더니 에어컨이 없었다. 이집트, 특히 룩소르는 여름에 최고 기온이 47도에 육박하는 곳이라 에어컨이 없는 교실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학과장 선생님께 교실에 에어컨을 설치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 보았고, 선생님은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렇지만 거의 두 달이 지날 때까지, 내가 몇 번을 찾아가 확인을 해도 에어컨 설치에는 진전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화가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집트 사람들이 얼마나 약속을 안 지키는지 불평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그 메일을 받은 한 분(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와서 영어를 가르쳤던 미국 평화봉사단원)이 자신도 예전에 한국의 대학에서 일할 때, 담당자에게 어떤 부탁을 하면 알았다고 해 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이 자주 있었단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외국에서 온 봉사자에게 부탁을 못 들어준다고 하는 것이 미안해서, 또는 체면을 생각해서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학과장 선생님이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와 비슷한 이유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이 어려우면 다른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식으로 제안해 보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이 말을 듣고 한국의 과거는 알지 못한 채 내가 그저 이집트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뒤처지는 나라라고 무시하는 마음을 갖고 학과장 선생님의 행동을 판단한 것이 부끄러웠다. 조언대로 제안한 나는 학과장 선생님의 배려를 받아 에어컨이 있는 다른 교실에서 문제없이 여름 보충수업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집트에서 과거 또는 현재의 우리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경험 또한 나에게는 큰 공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장도 성장이지만, 이집트에서의 2년은 교육에 대한 고민과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순간에 이집트 땅을 밟았지만, 사실 혁명 이후 2년 동안 내가 지켜본 것은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이 끝없이 좌절되는 과정이었다. 시민들의 손으로 독재자를 몰아냈다는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한 번의 혁명이 이집트가 안고 있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기에 크고 작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갈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이는 국가 경제에도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혔다. 나의 이집트 친구들 중에는 차라리 독재 시절이 나았다며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고, 새로운 대통령 모르시와 무슬림 형제단을 두고도 의견이 엇갈렸다. 어느 사회에나 갈등은 있기 마련이고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다만 느리지만 끈기 있게, 그러한 의견 차이를 좁히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인데 그러기에는 아직 사람들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이유를 이집트의 교육이 민주 사회의 구성원이 될 시민을 길러 내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사회뿐만 아니라 내가 만난 학생들 개개인의 삶에서도 교육은 성장과 변화의 동력이 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온전히 한국어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만났지만, 점차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학생들의 삶에서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일주일에 4시간 하는 수업으로는 졸업할 때가 되어도 일상 회화를 구사하는 정도가 고작인 상황에서, 학생들이 이집트 유적을 한국어로 설명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높은 목표였다. 처음에는 어떻게 가르쳐야 학생들의 실력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고민하며 따로 자료를 만들고 보충수업도 개설했다. 필기구 하나 없이 맨몸으로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학생의 자세를 역설하고, 수업에 늦거나 숙제를 하지 않으면 학기 초에 정해 둔 규칙에 따라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했다. 목표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이런 것들이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을 높이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아이들은 한국어 실력 향상보다도, 누군가가 애정을 가지고 자신들을 지켜보면서 열의를 가지고 성장을 돕고자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나 또한 학생들이 살면서 사용할 일이 얼마나 있을지 모를 한국어를 잘 가르치는 것보다도, 점점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이 주어진 삶의 조건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무기력하게 지내는 대신, 각자가 가진 고유의 특성에 맞게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펼치며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정을 주기 두려워했고, 학생들을 믿지 않았고, 항상 엄격한 선생님으로 거리를 두었는데도, 그 아이들은 그런 나를 자신이 만난 최고의 선생님이라고 말하며 과분한 사랑을 주었다. 우리 학생들에게 진 이러한 마음의 빚 때문에 나는 이 고민 어떻게 하면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개인이 성장하고, 함께 더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을 멈출 수 없다 생각했고,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꼭 답을 찾고 싶었다. 그게 꼭 이집트가 아니더라도, 내가 만난 학생들과 같은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앞으로 하고 싶었다.
 

 

지금 여기, ‘우리의 행복을 위한 공부
 

그리하여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나는 여러 질문을 안고 그것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국제개발협력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국제개발협력은 최빈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이 현재 처해 있는 빈곤에서 벗어나 경제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국제 사회의 여러 이웃들이 도움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돕는 것이 잘 돕는 것인지 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발또는 발전이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하는 일이다. 만약 지금의 대한민국을 좋은 발전의 모델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했던 대로 산업화를 추구하고 더 많은 소비를 장려하며 사람들을 도시로 모여들게 만들 것이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부수적인피해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어떤 것이 더 나은 변화이고 발전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국제개발협력은 단지 개발도상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금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함께 그려 보며, 그 세계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이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다른 나라의 교육 발전에 대해 고민하는 교육개발협력(또는 글로벌교육협력)을 공부할 때에도 한국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고민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의 학교가 처해 있는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가르침과 배움이 일어날 수 있도록 애쓰는 이들이나 학교 밖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시도를 접하는 것이 결국은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없는 오지에서 배울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과, 최고의 시설에서 부족함 없이 교육받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고 어떻게 둘을 비교할 수 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부족한 쪽이든 넘치는 쪽이든, 인간으로 태어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것의 정도에 상관없이 이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이 있다면, 분명 상대방으로부터도 도움을 받고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교육뿐만 아니라, 농업과 같이 우리 힘으로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 서로 도와 함께 잘 살기 위한 시도인 협동조합, 무조건 빠르고 편리한 것에서 벗어나 필요로 하는 적정 수준의 기술을 추구하려는 노력, 이 모든 것들이 한국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시도들이며, 앞으로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다.
 

이번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여름 연수에서 각자가 현재 갖고 있는 고민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나누는 자리를 가졌을 때 나는 고민=즐거움이라고 대답했다. 어떤 때는 문제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고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정말 다행인 것은 그 작업을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겉으로는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내가 가진 고민을 함께 풀어 갈 수 있는 벗이 되고, 나 또한 그 사람의 고민을 함께 짊어지는 동료가 되는 듯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고민하는 것은 나에게 괴로운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 된다. 골방에 틀어박혀 현재의 어둠을 보지 않음으로써 나 혼자 느끼는 행복과 안온함이 아니라, 당장은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빛을 꿈꾸며 더 많은 생명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그리는 것이 내가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이 글을 통해 좀 더 많은 벗들과 고민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함을 느끼며, 우리가 동시대인에서 동료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아래의 글로 인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시대의 어둠”을 보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시대의 어둠을 보았기에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동료인 셈이다. 이 어둠을 보는 행위는 당대와 거리를 띄우는 집단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거리를 띄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이다. 공부의 목적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 공동으로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서로 부추기는 과정이다. 

  - 엄기호, 〈카이스트의 유령들〉, 《교육 불가능의 시대》, 2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