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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학기

근대 한국교육의 형성

 

 

주한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의 경험과

그 교육적 의미에 대한 고찰


- 1968
년 평화봉사단 소식지 여보세요를 중심으로 -

 

 

1. 들어가며

 

이제는 어디를 가든 쉽게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각종 매체를 통해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로부터 이들의 경험과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같은 것이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해 미리 정보를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은 생활 속에서 느낀 문화적 충격이나 새로움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세계화가 이루어져 국가들 간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해지기 전에는 과연 어땠을까? 예전에는 특정한 지역이나 구역을 제외하면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없었고, 소위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사회에서 생김새부터 확연히 차이가 나는 외국인들은 분명한 이방인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이들이 낯선 존재였듯이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 또한 자신들에게 익숙한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기에,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이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당시의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찾아왔던 외국인들은 국적 및 직업에 있어 다양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미국 평화봉사단원을 대상으로 이들의 경험과 그것의 교육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창설된 평화봉사단(Peace Corps)은 개발도상국에 교육, 보건, 농업과 같은 분야의 전문 인력을 단원으로 파견하여 그 사회의 발전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파견 기간은 2년으로, 현지 언어를 사용하고 주민과 비슷한 생활수준으로 사는 것이 권장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에는 1966년 처음으로 파견되어 1981년까지 총 1,700명이 넘는 단원이 교육과 보건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였는데, 15년의 활동을 끝으로 철수하게 된 것은 한국이 어느 정도의 경제적, 교육적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공식 문서는 밝히고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평화봉사단원 소식지를 만들어 이를 통해 서로의 소식과 생각을 교류했는데, 1960년대에는 여보세요(Yobosayo), 1970년대에는 짬뽕(Noodle)이라는 제목의 소식지를 발행하였다. 다른 자료가 아닌 소식지를 중심으로 이들의 경험을 재구성해보고자 한 것은, 단원으로 활동할 당시에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생생함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행된 실물 소식지가 따로 보관되어 있는 곳은 없었기 때문에 단원들이 개별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것을 스캔한 파일을 평화봉사단원 커뮤니티에서 찾아내었는데, 1967년부터 1970년까지의 소식지 파일 20개와 1972년 이후 소식지 파일 18개가 구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도 방대한 양이었고, 시기에 따라 단원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에 여기에서는 1968년에 발행된 소식지 5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였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학술논문으로는 영어교육에 있어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연구한 최용연(1969)의 논문이 유일했다. 여기에서는 평화봉사단원들의 경험의 범위를 교육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짓는 대신, 이들이 한국에서 어떠한 경험을 했는지를 소식지를 통해 살펴보고, 그것이 교육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2. 미국 평화봉사단원이 경험한 한국

 

1) 한국 교육 시스템 속의 원어민 영어 교사

 

교육 분야 단원들은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즉 영어를 모어로 하지 않는 화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훈련을 받고 한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TESOL에서 중시하는 듣고 말하기 방식(aural-oral approach)이 한국의 학교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봉사단원은 평화봉사단이 목표로 하는 영어로 더 많이 의사소통하기에 부합하면서도 읽기 중심의 한국 시스템에서 잘 작동하는 전체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개발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기술적인 지원도 없이 한국과 같이 힘든 나라에서 해 온 활동은 인상적이었다.

 

또한 한국에 처음 파견된 K-1 단원들은 고등학교로 배정받았지만 그곳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TESOL 방식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중학교나 대학으로 근무지를 변경하였고, 이후 단원들은 주로 중학교로 파견되었다. 여기에 대해 Bill Waycie라는 단원은 부정적인 의견을 드러내면서, 힘들더라도 고등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만약에 우리가 고등학교를 피하면, 우리는 한국 교육 전체를 피해야 한다.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우리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고등학교나 대학에서도 우리의 자리는 없다.

 

이처럼 독해 위주 시험 대비 교육을 하는 한국의 학교에서 원어민 영어 교사의 역할을 담당한 단원들은 종종 시스템과의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시스템에 상관없이 TESOL 방식대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 자체는 큰 어려움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정말로 실효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단원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당장의 수업이 아닌, 영어 교육 전반의 발전을 위해서는 한국의 시스템 내에서 한국의 맥락에 맞는 방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아래에서 발견된다.

 

평화봉사단이 영어를 가르치는 것을 향상시키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한국을 위해 독특한 TESOL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평화봉사단은 듣기는 좋고 읽기는 나쁘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듣기 방식이 성공을 거둘 때조차도 단원들이 시스템 바깥에 머무르도록 만들었다.

한국에서 TESOL의 목표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정도로, 한국의 맥락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수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들은 한국어로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교실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한국어를 더 잘 구사하여 학생과 동료 교사들을 잘 안다면, 그들이 학교 시스템 속에서 무엇을 문제로 느끼는지 알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2년을 채우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간 단원은 자신의 글에서 이야기했다. 이처럼, 낯선 한국의 교육 시스템 속으로 사전 준비 없이 들어온 평화봉사단 단원들은 여러 어려움을 느꼈지만 자신들의 방법이 무조건 옳다고 믿고 그것만을 고집하는 대신 보다 장기적인 맥락에서 한국의 교육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노력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우리가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우리만의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가는 식의 다른 원조 프로그램을 따라할 건가요?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확실한 성과입니다 - 우리는 때로는 어렵더라도 시스템 안에서 일해야만 해요. 우리는 국가와 지방 수준의 영어 자문 위원회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정부는 평소보다 더 중앙집권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흐름에 거스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정부가 문을 열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2) 한국 학교 안의 관찰자

 

학교에서 근무하는 단원들의 경우, 원어민 영어 교사로서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 것 외에도 교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한국 학교의 이모저모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에게 낯설게 보이는 풍경을 여보세요를 통해 다른 단원들과 공유했다. 예를 들어 Lynn Waters는 오후마다 여학생들이 하얀 앞치마와 스카프를 쓰고 학교를 청소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가 제시한 일화에 따르면, 이 여학생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 한 단원이 수업 시간에 이 유리창은 더럽다.”는 문장을 가르치려고 했을 때 학생들은 유리창이 더럽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문장을 반복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직접 학교를 청소하는 것은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는데, 앞의 일화에서처럼 학생들이 자신들이 맡은 임무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Lynn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미국의 학교들도 학생들에게 책임감을 심어주는 이러한 긍정적인 방식을 사용하면 어떨까? 다수의 아동 노동 방지법을 제외하면, (그러지 못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생들이 다칠 위험과 그에 따라 학교를 상대로 벌어질 소송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중학교 여학생들의 책임감과 성숙함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심지어 걸레를 손에 들고 5층 창문에 매달린다. 그들의 창문은 깨끗하다!

 

Lynn은 같은 글에서 학교에서 경험한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의 교사들이나 학교의 모습에 대해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 학교라면 연간 학사 일정이 분명하게 공지되어 있을 것이고 일과표를 숙지하지 못 한 교사를 찾기가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1960년대 후반의 학교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원어민 교사가 개인적으로 수업 자료를 준비했으나 말썽이 생겨 당황하는 장면, 학부모들이 학교를 방문하여 수업을 참관하는 모습 등이 아래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당시 학교의 풍경이다.

 

우리가 힘들게 배운 것은 다음과 같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수업에 가는 것은 처참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 교사들 중에 누구도 학교의 하루 일과나 연간 일정을 확실히 모른다는 것. (동료 교사들 중 세 명이 1224일 일요일이 크리스마스 전 마지막 학교에 나오는 날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들 중 한 명은 플란넬 보드는 미리 확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열심히 준비한 수업 자료가 학교를 방문한 학부모들 앞에서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아야했다.

 

권위적인 한국의 학교 문화는 이들에게 내적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Kevin Murphy는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발행한 문예 잡지가 검열 때문에 수거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내가 (그 학생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기사들 중 하나가 금서를 참고자료로 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높은 분이 모든 잡지를 수거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아마도 글을 쓴 학생이 북한 사람이 쓴 책의 일부를 인용하거나 했기 때문에 그 기사는 읽으면 안 되는 것이 된 듯했다. 나는 처음에 화가 나고 속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유롭게 말할 권리는 이런 종류의 검열을 하지 못 하게 하는 것이고, 교사로서 나는 학생들의 학술적인 자유를 보호하고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장려할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평화봉사단의 기본적인 이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상황은 정치적인 문제로 보여서, 평화봉사단 규정에 따르면 내가 개입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나는 잡지를 돌려주면서 누가 위에서 지시를 내렸든 그에 상관없이 나는 검열을 싫어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기본적인 불의로 보이는 일 앞에 무기력한 좌절감을 느낀 채로 남겨졌다.

 

학생들이 만든 잡지를 검열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당연하게 생각하였던 그에게 옳지 않은 일로 생각되었지만, 단원으로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그가 적극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는 것은 이들이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피부로 생생히 느끼는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3) 남성 위주 사회 속의 여성

 

생활 속에서 평화봉사단원, 그 중에서도 여성 단원들은 미국과 달리 남성에게 훨씬 더 큰 권한이 주어지는 한국 사회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 외의 문화적인 부분을 점차 이해하게 되면서 이들은 한국이 남성의 사회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Diane Stowe는 다음의 글에서, 겉보기에는 남성이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 남성을 잘 구슬려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은 여성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한국 남성은 사회적으로는 멸시를 받지만, 야망 있는 부인의 손에 잡힌 졸()”과 같은 존재였다.
 

한국은 정말로 남성의 사회인가? 표면적인 것들로부터 판단하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분명히 남성이 우선권을 가진다. 남성은 아이일 때 자기 부모와 누이의 보물로 생각된다. 해방된 미국 여성으로서, 여자형제들의 유순함은 나를 놀라고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자라나서 더욱 교묘한 형태의 지배권을 획득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일반적으로 한국 남성은 버릇없는 아이처럼,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한다. 결국 가장 큰 영향력과 원동력, 한국 가정의 야망은 부인이 갖게 된다. 그녀는 돈을 관리하고, 가정과 남성을 돌본다.

 

그런가 하면 이들은 한국 사회 속에 살아가는 외국인 여성으로서, 사람들이 자신들에 가지고 있는 편견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본다는 것이 처음에는 재미있게 생각되었지만 그러한 재미는 곧 사라졌고, 빠져나오기 힘든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이 뒤따랐다. 당시 한국인들이 미국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은 이들이 한국 여성과 쉽게 친구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는데, 한국의 도덕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미국 여성과 가깝게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여성은 덩달아 이상한여성으로 간주되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Diane Stowe는 한국에서의 미국 여성을 빅토리아 시대 미국에 살고 있던 프랑스 여성들에 비유하고 있다.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지금 한국에서 미국 여성은 빅토리아 시대 미국의 프랑스 여성들과 같다. 미국 여성은 분명히 더 해방되어 있고, 개인의 재량과 책임이 점점 더 중요하게 된 사회로부터 왔다. 한국 여성과의 우정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가 있기는 했어도, 일반적으로 냉랭한 관용이 지배적인 태도이다. 보통 (한국 여성과 미국 여성이) 친구가 되면 한국 여성은 이상한여성이 되고 다소 명예를 잃는다.

 

또한 Diane Stowe는 한국에서 여성들이 사회의 도덕 기준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요약하면, 남성에 비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적게 가지고 있는 여성은 일단 결혼을 해서 안정적인 지위를 가질 때까지는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교육을 받은 여성은 전통적인 도덕적 잣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고 서술한 점이 흥미롭다.

 

한국에서, 모든 사람은 규정된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고 그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재량은 남성에게 주어진다. 여성은 거의 흠잡을 데 없는 부인의 지위에 오르고 나서야 약간의 권력과 자유를 얻게 된다. 그렇지만 그렇게 결혼에 도달할 때까지, 여성들은 규칙을 잘 따라야 한다. 사회적 압력이 엄청나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대가가 크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도덕적 책임은 한국 여성에게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극심한 사회적 압력과 그 압력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나쁜 일을 하기가 어렵고 관습에 따라 좋은 여성이 되기 쉽다. 오직 독립적이고 교육을 잘 받은 여성만이 안전하게 일탈할 수 있다.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한국 사회의 변화를 전망하면서도 교육의 영향력을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였다.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한국이 전환기에 있는 것은 명백하다. 나는 지난 세대보다 젊은 여성들 가운데 더 많은 이상한여성이 있고, 한술 더 떠서 다음 세대에 더 많은 이상한여성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서울을 지방과 비교해 보라. 국가가 점점 더 많은 수의 여성을 교육하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않을 수는 없다.

 

, 전환기에 있는 한국의 상황을 볼 때 점차 해방된 여성이 늘어날 것인데, 그것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생각을 할 것이고, 자신들의 처지를 그저 받아들이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성의 지위와 관련해서도 당시의 한국과 미국은 상당히 다른 사회였기에, 단원들에게는 그 차이가 두드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남성 단원이 남긴 기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4) 이방인, 겉으로도 속으로도

 

한국인들과 확연히 다른 외모를 가진 미국인 봉사단원들은 어디를 가든 눈에 띄는 존재였다. 특히 면 단위의 보건소로 파견된 단원들의 경우 그 마을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는 내용에 대해서 주의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말한 것을 모두에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빙판길에 넘어져서 골반을 땅에 찧으면, 안타깝게도 이 광경을 보지 못 한 마을 사람들은 최소한 네 가지 복음의 버전으로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듣고 위안을 얻을 것이다.

 

물론 아래의 기록에서처럼 외국인 봉사단원들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했고, 이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감사의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에 도착해 첫 번째 월요일에 면에 갔을 때, 나는 약을 나누어주고 한국어로 양식을 작성하느라 바빴다. 나이가 아주 많이 든 할머니들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고 환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것은 정말 좋았고 나는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없어서 바보처럼 느껴졌다. 또 어떤 사람은 당신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한다. “Excuse me, good morning.” 때는 오후 2시이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다. 그들이 그런 수고를 무릅쓰는 것은 정말이지 친절하다. 이런 날이면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

 

가정방문을 하면서 하루에 대여섯 번 밥을 먹기 때문에 몇몇 봉사단원들은 살이 쪘다. Ruth Smith는 어느 날 점심 전에 다섯 공기의 오곡밥을 먹어야 했다. 확실히 시골의 한국인들은 동양의 아일랜드인이라기보다 유태인 어머니에 가깝다.

 

하지만 반대로 이들이 원하지 않을 때에도 동네 유지들의 대접은 계속되었고, 철없는 아이들은 따라 다니면서 놀리거나 아래에서처럼 짓궂은 행동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일부러 사람이 없는 시간을 틈타 목욕탕에 갔는데도 모든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상황에 놓일 때면 이들은 곤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들이 미국 사람을 본 것이 처음이라면 나는 개의치 않겠다. 그렇지만 이것이 매일 매일 일어날 때, 또는 그들이 다가와서 나를 때리거나 만지거나 발 주변에 돌을 던지기 시작하면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다.

 

그렇지만 겉모습으로 인한 차이가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은 한국보다 발전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음에도 자신들의 나라를 완전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은 않았는데, 한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런 부분에서 의견의 대립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경제적인 발전을 이룬 미국 사회가 잃어버린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일부 한국인들은 절대적인 빈곤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약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곳(‘혜심이라는 주점)에 가서 미국이 현재 위치한 잘못된 방향, 그러니까 경제학이 왕으로 생각되고 인간의 가치가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은 사회로 한국도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연세대학교의 남녀 학생들과 함께 토론을 할 수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맹렬한 대답을 들을 수도 있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배고픔을 몰라요. 당신은 배부른 상태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해 논합니다. 일단 우리는 먹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인간성에 대해 걱정할 수 있어요.”

 

또한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처럼 어떤 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 하고 거부되는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그 이유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John Cushing은 아래의 글에서, 외국인 봉사단원은 결국 한국을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에서, 평생 지금의 자리를 벗어나기 힘든 한국인들의 처지를 확인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지 묻고 있다.

 

왜 사람들은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것만으로 우리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일까? 나는 며칠 전 여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만약 당신이 죽을 때까지 이 나라에 갇혀 있을 것을 안다면 어떤 기분일까? 얼마 있어 비행기를 타고 탈출할 누군가를 보는 것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을까? 나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길 수 있고, 심지어 한국의 어떤 측면은 사랑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여기에 꼼짝없이 갇혀 있지 않다는 것, 언젠가는 이때의 경험에 향수를 느끼며 돌아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같은 글에서 봉사단원은 한국인들이 보여주기를 원하지 않는, 다소 부끄럽게 느껴지는 측면을 들쑤시고 다니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같다고도 이야기하였다. 단원들이 더럽고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도시에서 좌절감을 느끼듯이 한국 사람들도 그럴 것인데,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밖에 없으니 자신들을 좋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이질적으로 느끼는 자신의 면모를 발견하고, 환영받지 못 하는 상황에서 그 이유를 분석해보는 것은 이들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5) 일상 속에서의 낯섦

 

이 외에도 단원들은 자신들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생활하면서 다양한 방면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 단원은 함께 일하는 조산사를 따라 시골 마을에 갔다가 처음으로 침을 놓고 부항을 뜨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그림까지 곁들여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는 침을 전혀 소독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위생관념에 대한 우려는 소식지의 다른 글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변소를 사용한 이후 누구도 손을 씻지 않는다. 한번은, 변소에 다녀온 뒤에 나는 물과 비누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나는 손을 씻고 싶었다 그러자 나와 함께 일하는 가족계획 담당자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한동안 계속 웃었다. 나중에 우리는 길을 따라 걷다가 작은 다리를 건너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가족계획 담당자들은 아래에 흐르는 시냇물을 가리키며 저기에 물이 있어요; 가서 손을 씻으세요.”라고 말하고 또 웃기 시작했다. 소독 과정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이것은 나를 매우 좌절하게 한다.

 

다른 단원 또한 화장실 사용 후 손을 씻을 수 없는 환경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면장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하여 대야와 비누를 마련하겠다는 대답을 듣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처럼 보건이나 위생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서는 단원들은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얼음이 둥둥 뜬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해야 하는 상황을 특별히 힘든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자신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세배의 경우에도 문화적인 차이를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였다.
 

 

 

3. 평화봉사단원의 경험이 가지는 교육적 의미

 

그렇다면 이들은 위에서 서술한 한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다시 말해, 이들의 경험은 교육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활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간 1기 단원이 보내온 편지였다. Margaret Hershey는 아래의 글에서, 자신이 일상 속에서의 사소한 낭비에 대해 훨씬 민감해졌고 그 결과 작은 것이라도 절약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차를 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회에서, 그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데도 차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 경우에서와 같이,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생활한 경험은 자신의 원래 세계로 돌아간 이후에도 이들의 행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작은 차이들, 한국을 떠나기 이전에 추측했던 차이들에 대해서 보자. 하나는 우리 미국인들이 얼마나 낭비가 심한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한국 자동차가 코카콜라 깡통으로 만들어졌다는 농담을 하곤 했는데, 나는 그것이 아마 극단적 예시일 것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복무 이후, 비닐봉지, 종이봉지, 종이 상자, 유리병 등을 버리는 것은 여전히 나를 아프게 한다. 나는 이제 끈을 모은다. 예전에는 물건을 고치는 수고를 감수하기보다 그냥 버렸던 것에 비해, 이제는 물건을 수리하는 데 훨씬 낫다. 나는 아마 작은 것을 사러 가게에 가기 위해 자동차를 이용하는 데 관해 좀 기분 나쁘게 구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의 심부름을 하는 데에 차를 이용하는 데 대해 정말 죄책감을 느낀다.

 

Margaret Hershey는 또한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만나게 된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여러 종류의 물건들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조차도 반드시 사야하는 것으로 느끼게 만들어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글쓴이는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본인에게 매우 익숙했던 생활환경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를 주춤하게 만드는 또 다른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고 요구하는 물건들의 다양함이다. 나는 내가 한국에 있는 일 년 반 동안 물건들의 종류가 매우 다양해진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지만 이곳과 비교하면 한국은 여전히 생활하기에 매우 단순한 곳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눈을 빛내며 흥미로워하는 목소리로 에헤하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글쎄, 그렇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항상 즐겁지 않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나는 더 잘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매우 다르다. 그렇지만 내 경우에는 물질적으로 과도하게 풍요로운 것이 나를 힘들게 한다. 실제적인 물건이 그렇다기보다는, 새로운 파란색 전기 캔 오프너가 필요하다고 소리 지르는 것을 듣는 것 자체가 나를 압박한다. 나는 소유하는 것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고, 점점 더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감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때는 다른 사람들 수준에 맞추는 것만으로도 중간은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활동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지 않은 단원들도, 한국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통해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되면서 자신이 매우 당연하게 여겨왔던 세계관과 태도가 사실은 유일하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미국인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점점 더 광범위해지고 있다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말이다. 내가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더 깊이 알게 돌수록 나는 우리의 서구식 의견이 얼마나 편견으로 가득 찬 것인지 깨닫는다. 내가 항상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더 이상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편향된 것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자신만만한사람이 잃어버릴 수 있는 인간적인 상호의존의 깊은 진실성을 배울 수 있다. 나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신감이라는 미국의 이상을 불신하게 되었고 그것의 실체를 보았다 자신감이라는 것은 너무도 강력하고 이기적인 자부심이어서, 미국인들이 어떤 종류의 깊은 대인관계를 맺는 것을 종종 방해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에 대해 내적인 두려움을 갖게 한다.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판단과 재점검을 통해 기존의 가치관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로서 작용한다. , 미국인의 입장과 관점에서 민주주의와 인권과 같은 가치를 주장하는 대신, 그것이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인간의 가치로부터 나온 것임을 이해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인권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나는 어느 평화봉사단원이 기본적으로 미국의 시스템과 유럽의 유산인 세계관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가 한국과 깊은 소통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그가 민주주의인권’, ‘개인유동적인 사회와 같이 신성시되는 가치들을 꿰뚫어볼 수 있고, 그러한 가치들을 길러 낸 밑바탕이 되는 인간의 구성요소에 가 닿을 수 있다면, 그는 그의 시각과 완전히 반대되는 이상에 입문할 수 있고 결국 그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의 가치를 더욱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원들이 경험한 것과 이를 통한 배움은 미국의 학자 Mezirow가 이야기한 관점전환학습(Merriam, 2007)을 떠올리게 한다. Mezirow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존의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의미체계를 돌아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관점전환학습으로, Mezirow는 성인의 학습에 있어서는 지식을 습득하는 도구적 학습이나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의사소통적 학습보다도 이러한 학습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위에서 평화봉사단원들의 경험을 살펴보았을 때, 이들이 한국이라는 낯선 세계에 오게 되면서 기존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딜레마 상황을 맞닥뜨렸을 것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되돌아보고, 한국이라는 세계를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의미 관점을 만들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움은 책이나 말을 통해 전달하기 어려운 것이고, 실제로 그 상황에 들어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발생할 수 있는데, 귀국 단원인 Margaret Hershey의 글에도 이러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평화봉사단은 이 딜레마에 대해 말할 만한 것들이 있다. 훈련에서의 강의가 흥미롭기는 했어도 실제로 외국에 나갔을 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한 것 또는 시도한 것으로부터 가장 잘 배울 수 있고 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해 배운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나에게는 내가 가르칠 테니 너는 배워라.”에 반대되는, 배우는 법을 배우는 것과 함께 배우는 것의 개념이 아직 대학에 널리 퍼지지는 못 한 것처럼 보인다.

 

, 학교라는 공간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습자가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 들어가 직접 해 봄으로써 뭔가를 배우고, 더 잘 배울 수 있는 학습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평화봉사단 단원들의 경험이 갖는 교육적 의미 중 하나로 생각된다.

 

 

4. 나가면서

 

지금까지 이 글에서는 1968년에 발행된 미국 평화봉사단원 소식지 여보세요에 실린 글을 통해, 1960년대 한국에 파견되었던 단원들이 한국에서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 알아보았다. 영어 교사의 역할을 맡은 단원들의 경우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갈등을 빚는가 하면, 주변인으로서 한국의 학교를 관찰하며 그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 여성 단원의 경우 남성 위주의 한국 사회와 미국인 여성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실감하였고, 성별에 관계없이 이 사회의 이방인으로서 소외와 거부의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에게 낯설게 보이는 것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서도 보건이나 위생에 관련된 것에 있어서는 변화를 일으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에 온 평화봉사단원들은, 그것이 업무와 관련된 것이든 생활에 관련된 것이든 다양한 경험을 하였고 이로부터 많은 배움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경험은 특히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관, 기본적인 태도에 대해 돌아보게 했다는 점에서 이후의 삶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1968년의 소식지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글이 가지는 한계는 분명하다. 평화봉사단이 활동한 전 시기의 소식지를 자료로 삼아 이들의 경험을 분석한다면 여성과 남성, 파견 시기와 분야, 지역 등에 따라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또한, 한국에 온 평화봉사단원들이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학습했다면, 이들의 주위에 있었던 한국인들도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것이든 배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여기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학교의 틀 바깥의 한국 현대 교육사를 재구성하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